중세 유럽 전쟁의 주력은 농민이었다. 승패는 병력의 규모와 사기로 갈렸다. 전장이 아니라 밭이 일터인 그들에겐 이기든 지든, 누가 새로운 왕이 되든,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게 중요했다. 그리 절박한 투지가 그들에겐 없었다.
스위스 용병은 달랐다. 국토가 척박해 농업도 무역도 여의치 않은 가난한 나라. 바다가 없어 바이킹이 될 수도 없었다. 대신 이웃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강대국들이 벌이는 왕위계승ㆍ종교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너도나도 ’라이슬로이퍼(Reislaufer, 전장에 나서는 자)’ 즉 용병이 됐다. 잘 싸워야 재계약이 가능했고, 목숨까지 바쳐야 2세들에게 미래가 열렸다. 스위스 용병은 13세기 무렵부터 유럽 전장을 누비며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서의 명성을 떨쳤고, 돈 많은 왕가와 영주, 제후들은 앞 다퉈 그들과 계약을 맺고자 했다. 그들끼리 맞선 예도 없지 않았다.
단골 고객이 지금도 외인부대를 가진 프랑스였고, 또 한 곳이 마지막 남은 고객이라 해야 할 바티칸 교황청이다. 교황 율리오 2세 재임기인 1506년 1월 22일, 150명의 스위스 용병이 최초로 교황청에 파견됐다. 사도궁전의 치안과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는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가 그렇게 탄생했다.
1527년 5월 6일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 로마를 침략하자 당시 189명의 근위대 중 147명이 제국 군대를 막다가 전원 전사했고, 그 사이 나머지 42명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비밀통로로 피신시켜 끝까지 교황 곁을 지킨 일이 있었다. 그 신뢰가 바탕이 돼 지금도 교황청은 스위스 용병들로만 근위대를 충원하며 이날(5월 6일)을 기해 신병들의 충성 서약식을 연다. 1859년 연방헌법으로 용병제 자체를 공식 금지한 스위스 정부도 바티칸 근위대만은 ‘치안 경찰’의 지위로 입대를 허용한다.
‘민간 군사ㆍ치안회사(PMSCs)’라 불리는 근년의 용병산업 규모는 연 수조 달러에 이른다. 그 기업들 중 상당수가 ‘큰 손’ 고객이 있는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스위스에 본부를 둔 것도 전통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다. 다만 스위스는 군사 관련 국제법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영세중립국이고, 용병은 그 법들을 끔찍하리만치 가볍게 여겨, 해당 주(칸톤)들이 골머리를 썩인다는 소식도 종종 들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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