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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온기로 다가가는 마음

입력
2019.01.21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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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유년기의 앓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목이 따끔거리고 열이 나며 천장이 빙글거리며 돈다. 어머니는 가만히 내 이마를 짚어 보다가 동네 소아과로 나를 이끈다. 그곳은 한결같은 소독약 냄새가 난다. 대기실에 앉아 몽롱하게 기다리면 진료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근엄해 보이는 선생님 앞 동그란 의자에 앉는다.

선생님은 쇠로 된 압설자를 들어 내 목을 누른다. 쌉쌀한 맛이다. 이제 선생님은 청진기를 귀에 꽂고, 어머니는 내 티셔츠를 걷는다. 앞가슴에 청진기가 닿으면 차가운 느낌에 몸이 움츠러든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숨을 열심히 쉰다. 선생님은 열심히 청진기를 대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무엇인가 적고는, 약 잘 먹고 다음에 보자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돌아오면 쓴 가루약과 달달한 물약이 기다리고 있다. 기억의 잔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차가운 청진기, 소독약, 쓴 가루약으로 대표되는 감각이다.

병치레가 잦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건강하게 자라 의대생이 되었다. 어느덧 처음 진료의 기초를 배우는 실습 시간이었다. 수업을 위해 우리는 사전에 청진기를 구매했다. 의사의 상징인 청진기를 처음 써본다는 생각에 우리는 조금씩 들떠 있었다.

교수님은 말문을 열었다. “청진기가 없던 시절에도 의사는 환자의 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떻게 했을까?” “직접 귀를 대고 들었습니다.” “맞다. 상태가 안 좋거나 환부에서 고름이 쏟아져도 의사는 직접 자기 귀를 환자의 몸에 밀착시키고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시절 의사와 환자의 유대감은 대단했겠지. 하지만 청진기가 발명되었고, 교감하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그래서 청진기의 발명이 의사와 환자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귀와 가슴이 닿는 장면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졌다.

“여러분은 이제 의사가 될 것이고, 아직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유대감은 필요하다. 지금도 의사는 환자 몸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가 환자와 의사 사이를 처음으로 이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놓으면 안 된다. 첫인상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 느낌이 놀랍게 차가우면 환자가 진료를 두려운 것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환자에게 손대기 전 꼭 자기 손이나 청진기가 너무 차갑진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손이 차면 자기 손을 좀 비비고, 청진기도 자기 손으로 비비거나 입김을 불어서 조금 따뜻하게 만들어 놓고. 그래야 환자들이 진료를 편안하게 여긴다.” 우리는 수긍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대감에 대한 인상도 아직 선연히 남아 있다.

이제 나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몸에 닿던 청진기의 차갑고도 두려운 감각과, 한 실습 시간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도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와 내 청진기는 환자의 몸에 직접 닿아야 한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두 종류의 기억이 동시에 난다. 두려웠던 감각과, 그 감각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 그래서 나는 환자를 받으면 습관적으로, 말을 섞고 진료를 하면서도 무엇인가 빌거나 간청하는 동작으로 철없이 양손을 비비거나 손과 청진기에 김을 불어 넣는다. 마치 안온한 느낌이 손끝에서 분출되어 당신의 두려움이 달아나기라도 할 듯이.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환자들의 속살에 손이나 청진기가 닿을 때, 종종 환자가 약간의 한기를 느껴 움찔거리거나 놀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조금 부족했구나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미안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그 철없는 동작을 습관적으로 멈추지 않고 있다. 그것이 처음 만난 그들에게 심적인 유대감으로 닿을 것이며, 가끔은 전달되지 못할지라도, 촉박한 시간에 최선을 다해 준비한 온기를 나누며 다가가는 것이 내 일의 핵심이라 믿기 때문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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