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사 투유유 교수가 지난해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현대 중의학은 그만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중국 역대 국가 지도자들의 확고한 중의약 육성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은 중의경전을 매일 연구하고 원로 중의사와 중의학 이론에 대한 토론까지 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에 못지않게 한의학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국가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조선왕조의 중흥기, 실학의 시대를 이끈 정조대왕이다.
얼마 전 필자는 수원을 방문해 화성(華城)성곽과 행궁도 둘러보고 화성의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박물관을 방문했다. 당파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이라는 정조대왕의 원대한 포부와 의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조대왕의 총애하는 신하이자 실학자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두루 참고해 만든 지금의 크레인 격인 거중기와 녹로 등을 활용한 유물이었다. 짧은 시간에 장대한 석재들을 쌓아 동양 성곽 축성술의 백미라 할 튼튼한 국방요새를 만들었다는 것과 이런 축성의 모든 과정을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으로 매우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점이 특히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이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에 지정되기에 충분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문화재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조대왕이 어떤 분인가! 왜 우리는 조선의 여러 국왕들 중 유독 정조 임금을 세종과 함께 대왕이라 높여 부르고 있는가? 그 분의 일생은 알면 알수록 정말 대왕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대단한 개혁군주였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이런 정조대왕이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조선후기의 우리 역사는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정조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던 그 끔찍한 기억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정조는 신경정신과 치료약을 자주 복용해야 했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직접 성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조선 국왕 27명중 유일하게 무려 108권에 달하는 문집을 남길 만큼 뛰어난 학식의 명군주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정조는 세자시절부터 한의학연구에 매진하여 ‘수민묘전’이란 한의서를 직접 집필하였는데, 이를 증보한 책이 바로 동의보감의 업그레이드판인 유명한 한의서 ‘제중신편’이다. 정조가 국왕인 동시에 직접 한의서를 집필할 만큼 뛰어난 한의학자였다는 이런 사실은 오늘날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한의학자나 의관은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떠올리게 되는 중인계급의 사람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의원 의관뿐 아니라 위로는 국왕부터 사대부출신의 고위관료에 이르기까지 한의학을 공부하여 처방하고 한의서까지 집필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분들은 별도로 ‘유의(儒醫)’라 호칭한다. 역대 국왕의 치료에도 치료의 기술적인 부분은 의관이 맡았지만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은 유학자출신의 대신들이 직접 검증을 거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정조대왕의 충신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마과회통’이라는 한의서를 집필하고 한의학이론을 실사구시 관점에서 비판하고 발전시킨 뛰어난 한의학자이기도 했다. 국왕과 국가 지도층의 한의학사랑의 전통은 대한제국에까지 이어졌지만 일제 강점시기 이후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서양 의약제도만을 강요하면서 한의약탄압을 대대적으로 펼쳐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승렬 한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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