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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11년 걸친 다이아몬드 내전 끝낸 시에라리온

입력
2019.01.18 18:00
수정
2019.01.18 21:2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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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지속된 내전 배경엔 ‘피의 다이아몬드’ 자원 전쟁 

 허약한 정부와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수차례 쿠데타 

 소년병ㆍ사지절단ㆍ강간…적나라한 전쟁의 참상 드러나 

 아프리카평화유지군은 2017년 노벨평화상 후보 거론도 

지난 2000년 5월 시에라리온 군의 14살 소년병 아부 카마라(왼쪽)가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약 55km 거리에 있는 마시아카 인근의 한 마을을 지키던 중, 선임 병사로부터 자동 소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시아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2000년 5월 시에라리온 군의 14살 소년병 아부 카마라(왼쪽)가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약 55km 거리에 있는 마시아카 인근의 한 마을을 지키던 중, 선임 병사로부터 자동 소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시아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Freetown)은 본래 그 이름처럼 1787년 영국의 노예 폐지론자들에 의해 노예의 송환과 구출을 위한 ‘자유의 땅’으로 마련된 곳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808년 프리타운을 왕령 식민지로 선포하고 포획된 노예선의 노예들을 정착시켰으며, 1896년에는 보호령으로 선포해 식민지배를 시작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다른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들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국가발전은 침체됐고,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점차 커졌다. 시에라리온은 독립 이후 허약한 정부와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수 차례 군부 쿠데타를 겪었고, 이웃국가 라이베리아의 내전까지 시에라리온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1991년 3월 23일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의 지원을 등에 업은 포데이 산코의 혁명연합전선(RUF)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1985년 쿠데타로 집권한 조셉 모모흐 정권을 공격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까지 11년 동안 지속되면서 약 5만명 이상의 사망자와 45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의 지도자 포데이 산코(맨 오른쪽)가 지난 2000년 5월 16일 분노한 시민들에 붙잡혀 이송되고 있다. 1주일 간 은신 중이던 산코를 이날 발견한 시민들은 그를 구타한 후, 정부 당국에 넘겼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의 지도자 포데이 산코(맨 오른쪽)가 지난 2000년 5월 16일 분노한 시민들에 붙잡혀 이송되고 있다. 1주일 간 은신 중이던 산코를 이날 발견한 시민들은 그를 구타한 후, 정부 당국에 넘겼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2년에는 산코의 공격에 정부군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데 불만을 품은 군부 쿠데타도 발생했다. 밸런타인 스트라세르 대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4년간 통치하지만, 1996년 1월 또 다른 군 지도자 줄리어스 마다 비오에 의해 축출된다.

다행히도 비오는 자유선거를 통한 민정이양을 약속했고, 계엄령하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의 아메드 테잔 카바가 1996년 3월29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카바 대통령은 그 해 11월 말 RUF 지도자 산코와 아비장 평화협정(Abidjan Peace Accord)을 체결하지만 성공적으로 이행되지는 못했다.

이후 1997년 5월 아비장 평화협정 불이행에 불만을 품은 하급 장교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대통령을 축출하고, 조지 폴 코로마가 군혁명위원회(AFRC)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다. 민간정부를 전복시킨 코로마 정권은 국내적으로는 카바 대통령을 따르는 민병대의 공격을 받는 한편,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난과 제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사태 해결을 위해 인근 국가들이 나섰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가 나이지리아 주축의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을 1997년 시에라리온에 파병하지만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코로마는 스스로 대통령임을 선언한다. 그 해 8월 영연방은 카바 대통령의 무조건 복귀를 선언하고, ECOMOG는 병력을 3배로 키워 코로마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1998년 2월 ECOMOG는 수도인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3월 카바는 대통령에 복귀했다.

지난 1999년 9월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에 있는 ‘전쟁 부상자와 절단 환자를 위한 캠프’에서 내전 중 두 손을 잃은 한 시에라리온인이 다른 부상자가 팔걸이 붕대를 매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프리타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999년 9월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에 있는 ‘전쟁 부상자와 절단 환자를 위한 캠프’에서 내전 중 두 손을 잃은 한 시에라리온인이 다른 부상자가 팔걸이 붕대를 매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프리타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은 1999년 1월 RUF가 프리타운을 점령해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지절단, 강간 등 잔인한 범죄를 자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ECOMOG가 치열한 공격 끝에 프리타운을 탈환했지만 RUF는 1997년 나이지리아에서 체포된 산코가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공언했다. ECOMOG 주도국인 나이지리아는 자국에 부담이 가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산코를 풀어주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시에라리온에 촉구하였다.

결국 유엔과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중재 하에 1999년 7월 토고에서 로메 평화협정(Lomé Pea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즉각 전투를 중단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무장해제를 감시토록 하는 한편, 산코를 석방하여 부통령직을 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이후 RUF가 평화협정을 준수하지 않을 뿐 아니라, 2000년 5월 다시 프리타운을 공격하자 영국은 허약한 카바 정부를 지원하고 영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한다. 영국은 약 800명의 낙하산 부대를 투입한 팔리서 작전을 통해 프리타운을 탈환했고,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됐다. 마침내 2002년 1월 18일 카바 대통령은 내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2002년 5월 총선에서 카바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재선됐고, 정당으로 참여한 RUF는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2012년 4월 시에라리온 동부 코이두에서 소규모 수작업을 하는 광부들이 다이아몬드를 골라내고 있다. 시에라리온에 다량이 매장돼 있는 다이아몬드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총 11년간 이어진 유혈 분쟁의 배경 중 하나가 됐다. 코이두=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2년 4월 시에라리온 동부 코이두에서 소규모 수작업을 하는 광부들이 다이아몬드를 골라내고 있다. 시에라리온에 다량이 매장돼 있는 다이아몬드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총 11년간 이어진 유혈 분쟁의 배경 중 하나가 됐다. 코이두=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에라리온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ECOMOG는 2017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을 대체하여 아프리카연합(AU) 또는 역내 지역기구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역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내전 기간 RUF는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와 다이아몬드를 불법적으로 거래하여 무기를 수입했다. RUF는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로 연간 2억 달러의 수익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유엔은 다이아몬드 공정거래를 위해 다이아몬드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킴벌리 프로세스' 감시 체제를 구축하고, 분쟁지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에 대한 국제적인 거래를 금지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2007년 개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내전과 분쟁 광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에라리온 분쟁은 서아프리카 정치 상황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는 1989년 모모흐 대통령에게 시에라리온을 라이베리아 무장투쟁 기지로 사용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시에라리온이 라이베리아에 파병된 ECOWAS 주도의 평화유지군에 약 300명의 병력을 파병한 것에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 시에라리온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국경지역에 산재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비아 역시 RUF를 만든 산코에게 군사훈련을 제공하여 내전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시에라리온 대통령 줄리어스 마다 비오(맨 오른쪽)가 대선후보 시절이던 2018년 1차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준장 출신으로 과거 쿠데타에 두 차례 참여했던 그는 1996년 민정이양을 진행하기도 했다. 프리타운=AP 연합뉴스
시에라리온 대통령 줄리어스 마다 비오(맨 오른쪽)가 대선후보 시절이던 2018년 1차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준장 출신으로 과거 쿠데타에 두 차례 참여했던 그는 1996년 민정이양을 진행하기도 했다. 프리타운=AP 연합뉴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 1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내전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태이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소년병 강제 모집과 팔다리ㆍ귀ㆍ입술을 잘라내는 신체 절단, 그리고 강간과 강제 노동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아프리카 내전과 분쟁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제 시에라리온은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있으며 평화와 발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서히 회복되고 있던 시에라리온은 2014년 7월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병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18년 4월 치러진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오가 대통령에 당선돼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오 대통령은 준장 출신으로 쿠데타에 두 번이나 참여했으며 1996년 민정이양을 진행한 인물로 시에라리온 민주주의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비오 대통령은 집권 당시 약속했던 초ㆍ중등 무상 교육과 정부의 차관도입 사업들을 재검토하여 중국의 신공항 건설 사업을 취소하고 광산 채굴권 합의 내역을 재검토하는 등 시에라리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교수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교수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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