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세트
존 맥스웰 쿠체 지음ㆍ왕은철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총 1,000쪽ㆍ4만3,400원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한다.’ 고귀한 명제처럼 오랫동안 받아들여지던 문구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실재가 작가의 작품세계를 훼손하기도 혹은 부풀리기도 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작품 위에 자신을 얹고 싶은, 그리하여 자신의 삶 또한 높아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욕망 때문일 수도 있고, 훌륭한 작품으로도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작가의 과오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작가와 작품이 별개로 읽히기 어려운 시대다.
지금,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작가 존 맥스웰 쿠체(국내에서 J. M. 쿳시로 종종 불린다)의 자전소설 ‘서머타임’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감흥을 안긴다. 엄격하리만치 삶과 글을 분리하고자 했던 노작가의 치열한 자기 반성을 읽는 동시에 자전소설은 절대 쓰지 않을 것 같은 작가의 자전소설이라는, ‘아이러니의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서머타임’은 쿠체 자전소설의 3부작 중 마지막 이야기다. 자전소설 3부작은 열 살 때부터 열세 살 때까지(1950~1963)를 다룬 ‘소년 시절’, 열아홉 살 때(1959)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담은 ‘청년 시절’, 미국에서 귀국한 1972년부터 첫 소설을 발표한 1977년까지를 품은 ‘서머타임’으로 이뤄져 있다.
‘서머타임’은 3부작 중 작가의 삶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다. 쿠체가 2006년 죽었다고 가정하며 (소설 밖 쿠체는 지금도 생존해 활발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소설은 시작된다. 전기작가 빈센트가 쿠체가 남긴 메모를 토대로 생전 그가 관계 맺었던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인터뷰는 쿠체와 불륜관계였던 줄리아, 쿠체와 가까웠던 사촌 마르곳, 쿠체가 구애했던 아드리아나를 통해 연인으로서 쿠체라는 남자를 재구성하고 그와 감정적으로 얽힌 것들을 풀어낸다. 쿠체의 대학 동료였던 마틴과 소피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작가이자 문학 선생으로서의 쿠체에 대해 진단한다.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쿠체가 ‘위대한 작가’라는 빈센트의 평가와 정반대다. 소설 속 쿠체는 초라하고, 실패의 분위기를 풍기고,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책을 쓰고, 눈앞의 대상이 아닌 머릿속의 관념을 사랑하고, 베스트셀러는 쓸 줄 모르고, 정치와 국가에 관한 모든 것을 혐오하는 인간이다. 구애한 연인들로부터도 번번이 ‘그는 나의 왕자가 아니었어요’라는 소리만 전해 듣는다. 작가이자 선생으로서는 “많은 것들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지만 특정한 하나에 대해 대단히 많이 알지 못”했으며 “대중의 마음을 완전히 얻지 못했고 쌀쌀맞고 거만한 지식인”이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저 짜증나도 당황스러운 존재”였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저 한 남자,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 재능이 있었고 어쩌면 천부적 재능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거인은 아니었던” 남자로 쿠체는 평가된다.
소설이 서술하는 인물은 쿠체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소설 속 쿠체는 독신자로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지만 현실의 쿠체는 영국 유학 중 결혼해 아이 둘을 둔 아버지였다. 줄리아와 마르곳, 아드리아나 등 인터뷰 대상 역시 허구의 인물이다. 소설에서 기술된, 남아프리카와 아프리카너에 대한 쿠체의 복잡한 감정, 예술관이나 정치관 등은 실제 쿠체의 생각과 결을 같이한다. 소설 안팎의 쿠체는 교묘하게 겹치거나 어긋나면서 종래에는 허구와 진실의 명확한 경계를 찾는 일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쾌감은 이 모든 재구성이 쿠체 본인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데서 비롯된다. ‘비밀스러운 작가’가 노년에 가상의 화자를 통해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데, 그것마저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쿠체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사생활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쿠체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수상 연설 역시 자신의 소설 ‘He and His Man’의 한 대목을 읽는 것으로 대체했다. ‘마이클K’와 ‘추락’으로 최초로 부커상을 두 번 수상했을 때도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오로지 소설로만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다. 연민도 치장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볼 용기를 가진 자만이 택할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3부작의 번역을 도맡은 왕은철 전북대 교수는 케이프타운대학교 영문과에 객원교수로 재직하며 쿠체와 동료 교수로 연을 맺기도 했다. 번역 과정에서도 쿠체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원작의 오류를 발견해 바로잡았을 만큼 국내 대표적인 쿠체 전문가다. 쿠체의 자전소설 3부작 중 ‘소년시절’이 2004년 번역돼 나온 적은 있지만 3부작 모두가 완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체의 자전소설을 읽는 경험은 흥미롭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삶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며, 두 세계가 어떻게 닮아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서머타임’의 말미 소피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의 인생-이야기들은 현실세계가 강요하는 구속력에 따르거나 반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아무런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것이 결국 오독도 해독도 없는, 가장 정확한 해석의 길인지도 모른다. ‘서머타임’으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중 하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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