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돌직구 경고문
15일 서울 노원구의 한 카페 계산대 앞에 반말 금지 경고문이 부착돼 있다. 보는 이에 따라 다소 거북스러울 순 있으나 손님 앞에서 항상 ‘을’일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들이 스스로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같은 경고, 또는 안내문을 자신의 점포에 붙이는 정도가 전부다.
15일 오승민(32)씨가 운영하는 서울 동대문구의 편의점 계산대에 사진과 전화번호를 함께 넣은 게시물이 부착돼 있다. 오승민씨 제공
김미미(43)씨가 운영하는 전남 여수 주점의 안내문. 김미미씨 제공

“작년 여름 손님이 아르바이트생한테 ‘학생아 이거 가지고 와라 저거 가지고 와라’ 이런 식으로 말을 하길래 ‘저희 직원들한테 반말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도 반말을 계속해서 그 손님한테 ‘네가 갖다 먹어’라고 말했다.” 전남 여수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김미미(43)씨의 ‘갑질 퇴치 무용담’이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은 일부 지도층만의 일탈이 아니다. 동네 카페부터 식당, 병원, 학원 등 주변 일상에서도 갑질은 난무한다. 반말은 예사고 욕설과 함께 온갖 행패를 부리는 손님을 언제까지 왕으로 모셔야 하는가. 매번 당하고만 있을 수도, 그렇다고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전국의 수많은 ‘김미미씨’들은 고심 끝에 ‘돌직구’ 경고문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반말에는 반말이 약

“커피 나왔다 가져가~” 반말 들으니까 어때?

서울 노원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서모씨는 두 달 전 계산대 앞에 이 같은 경고문을 붙였다.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반말 문구는 반말과 무례를 일삼는 일부 손님에 대한 반격이었다. 서씨는 “원래 반말하던 분들이 보고 뜨끔해하는 것 같다. 이렇게 붙인 뒤엔 반말 주문이 거의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사이다 같은 경고문에 대한 호응도 상당하다. 그는 “알바 도중 비슷한 경험을 해 본 대학생, 특히 여학생들이 공감을 많이 해준다”라고 말했다. 

◇직원 괴롭히지 말고 사장한테 직접 말하세요

동대문구의 한 편의점 계산대에는 점주의 사진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안내문엔 ‘남의 집 귀한 아들 딸 괴롭히지 마시고 불만사항은 언제든 전화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일부 손님의 시비와 폭언, 심지어 성폭력적 발언으로부터 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점주 오승민(32)씨의 아이디어다. 오씨는 “책임자가 누군지 당당하게 밝힘으로써 직원과 손님 사이의 불필요한 감정 다툼을 방지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 편의점 역시 안내문을 붙인 후부터 진상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

◇분홍 배지의 호소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들은 ‘반말 금지’ ‘상호 존중’ ‘인격 모독 금지’ 등이 적힌 분홍색 배지를 자율적으로 착용하고 있다. 지난해 2월 한 종합병원 간호사의 자살을 계기로 달기 시작한 배지에는 태움 근절 외에도 폭언 등 비상식적 행동을 하는 일부 환자 및 보호자들에 대한 경고 의미도 담고 있다. 전기숙 연세의료원 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주로 간호사나 업무과 직원을 상대로 막말이나 집기를 던지는 등의 폭력 행위가 일어나는데, 병원에서는 환자나 보호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고려해서인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결국 유니폼에 단 배지 몇 개가 갑질 폭력으로부터 이들 스스로를 보호하는 거의 유일하면서 가장 적극적인 대책인 셈이다.

◇‘프로 갑질러’ 제압하는 ‘슈퍼 을’

손님의 갑질이 경고문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경고대로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김미미씨는 “반말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분한테는 다가가서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고 손으로 경고문을 가리킨다. 그러면 ‘오, 사장님 센 분이네’라며 반말을 거둔다”라고 말했다. 경고문엔 ‘반말로 주문시 나도 반말로 주문 받음 OK?’라고 적혀 있다. 또다른 업주 서모씨 역시 “반말로 주문을 하길래 반말로 주문을 받은 적도 실제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의 한 간호사가 15일 왼쪽 가슴에 분홍색 배지를 여러 개 달고 업무를 보고 있다.
김서하(32)씨가 운영하는 강원 강릉의 한 식당에 부착된 안내문. 메시지 전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캘리그래피로 정성스럽게 꾸몄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요청으로 문구에 ‘손님’ 단어를 뺼 수 밖에 없었다. 김서하씨 제공
충남 계룡 운전면허학원의 게시물. 이 게시물은 완곡한 표현을 담은 다른 게시물로 대체됐다. 이재은(26)씨 제공
경남 양산 카페의 안내문. 일부 손님이 불쾌함을 표시해 한 달 만에 제거했다. 카페 매니저 이모(29)씨 제공
◇‘갑’의 눈치 살피는 ‘을’의 현실은 여전

그러나 불경기 속에서 손님 한 사람이 아쉬운 ‘을’들은 여전히 ‘갑’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경남 양산의 한 카페는 ‘진상 금지’ 안내문을 써 붙였다가 손님들 분위기가 좋지 않아 한 달 만에 치웠고, 강원 강릉의 한 프랜차이즈 식당의 경우 본사 지시에 따라 ‘손님’ 단어가 들어간 안내문을 모두 뗐다. 점주 김서하(32)씨는 “손님들이 반감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직원들을 막 대하지 말아 달라’는 강한 어조의 안내문을 게시한 충남 계룡의 한 운전면허학원은 5개월 만에 완곡한 표현으로 문구를 수정했다. 수강생들의 잦은 욕설과 난동을 차단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한 문구 역시 소용이 없었다. 직원 이재은(26)씨는 “문구 내용과 상관없이 수강생 진상은 여전하다”라고 전했다.

갑질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데는 법, 제도적 장치가 허술한 탓도 있다. 지난해 10월 감정노동자보호법이 개정됐지만 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보호 의무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욕설, 반말, 희롱 등의 갑질 행위는 여전히 처벌이 쉽지 않다. 서울 신촌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박세웅(39)씨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손님으로 많이 오는데 그중엔 자기 가게에서 갑질을 당하고 남의 가게에 와서 갑질을 하는 분들도 계시다”라고 말했다.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는 현실에서 일시적인 갑의 권능을 누리기에만 급급한 세태를 그는 답답해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혜윤 인턴기자

이용우(41)씨가 서울 관악구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부착된 안내문. 이용우씨 제공
서울 중구 편의점 게시물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