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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레이건과 이순자

입력
2019.01.16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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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다. 그는 1981년부터 8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에 대해서는 감정이 썩 좋지 않다. 특히 그가 1983년에 수립한 전략방위구상 때문이다. 적국의 핵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구상인데, 스타워즈(Starwars) 계획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같은 존재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최근에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국민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의 개인적인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 우리는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유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1994년 11월 전직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국민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데,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온 국민에게 알리면서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다른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연대를 표시하는 편지다. 다스 베이더가 연민과 존경의 대상이 된 건 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잘 몰랐다. 뭔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알츠하이머란 무엇인가? 해설 기사에서는 치매라고 했다. 치매는 또 무엇인가? 뭐든지 쉽게 설명하는 우리 엄마는 간단하게 표현했다. “그 집 노인네 노망났대.”

알츠하이머는 치매이고, 치매는 노망이라는 등식이 금방 성립되었다. 하지만 잘못된 등식이다. 쉽게 설명한다고 해서 그게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알츠하이머가 치매인 것은 충분조건이지만 치매가 알츠하이머인 것은 필요조건이다. 즉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부분 집합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가장 흔한 형태로 75%를 차지하며 혈관성 치매와 루이소체 치매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사람은 기억력과 학습능력이 떨어진다. 말하기와 운동능력도 떨어진다. 레이건은 자신의 상태를 미리 알림으로써 국민들의 이해를 구한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타우 단백질이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발생한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아직도 그 원인과 발생 기전은 논란거리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법 역시 확립된 게 없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료할 수 없는 퇴행성 뇌질환이라서 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점차 의존하게 된다. 가족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건은 편지에서 알츠하이머 환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단지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환자와 환자 가족에 대한 연대를 분명히 표시한 것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격 있는 행동이다.

치매라는 말은 쓰기가 꺼려진다. 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呆)를 쓰는 한자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리석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치매 환자가 (애정 없는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치(癡)에는 미치광이라는 뜻도 있고 ‘치한’과 ‘치태’ 그리고 ‘치정 살인사건’처럼 안 좋은 말에 쓰인다. 아무리 봐도 치매는 모욕적인 단어다. 환자에게 쓸 말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이 단어를 버리고 다른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노망(老妄)은 말할 것도 없다.

2019년 1월 1일 연희동에 거주하는 이순자 씨는 한 보수언론과 인터뷰 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저는 우리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그의 남편은 누구인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 내내 폭정을 일삼았던 인물이다. 법원이 내린 판결을 무시하고 아직도 벌금과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범죄자다. 지금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받는 재판에 고의적으로 출석하지 않고 기피하다가 법원으로부터 구인장을 발부받은 자다.

이순자씨는 자신의 남편이 치매를 앓고 있어서 재판에 정상적으로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측근들도 그가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고 있어서 방금 한 말도 기억 못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설마 없는 알츠하이머병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자라면 치료해야 한다. 그 가족에게도 위로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이순자씨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남편 전두환씨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 환자들에 대한 연대를 이끌어 냈는데, 전두환씨와 그 가족은 알츠하이머 환자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서라. 당신들은 노망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도 전두환씨가 저지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순자씨의 망발에도 불구하고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그 가족에 대한 연대의 마음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들보다 세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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