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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감독 엄유나 “사람의 귀함을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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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감독 엄유나 “사람의 귀함을 말하고 싶어”

입력
2019.01.15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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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나 감독은 “우리 역사에는 보통 사람들의 힘으로 큰 변화를 이뤄낸 경험이 많다”며 “영화 ‘말모이’가 우리 아버지, 삼촌, 옆집 아저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혜윤 인턴기자
엄유나 감독은 “우리 역사에는 보통 사람들의 힘으로 큰 변화를 이뤄낸 경험이 많다”며 “영화 ‘말모이’가 우리 아버지, 삼촌, 옆집 아저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혜윤 인턴기자

시나리오 데뷔작 ‘택시운전사’(2017)로 1,000만 관객을 만났고, 연출 데뷔작 ‘말모이’로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이 숫자들이 증명하는 건, 좋은 영화란 결국 ‘좋은 이야기’라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다. 그런 의미에서 엄유나(40) 감독은 좋은 작가, 연출가이기 전에 ‘좋은 이야기꾼’이다.

두 영화는 닮았다.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운 함성을 실어 날랐고, ‘말모이’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 말과 글을 지킨 이들의 숨겨진 헌신을 꾹꾹 새겨 넣었다. 14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엄 감독은 “‘택시운전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라면, ‘말모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라며 “전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말모이’가 가야 할 길만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인공은 까막눈 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아들 학비 때문에 정환의 가방을 훔쳤다가 조선어학회 사환으로 일하게 된 판수는 글을 깨치면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그런 판수를 보며 정환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는 의미를 깨닫는다. 엄 감독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우리 말과 글을 조선어학회로 보내 온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해진과 윤계상의 연기 호흡이 탁월하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유해진과 윤계상의 연기 호흡이 탁월하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엄 감독은 판수 역에 유해진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 유해진은 대사인지 즉흥 연기인지 헷갈릴 만큼 생동감 있는 연기로 판수를 빚어냈다. 웃음 뒤에 애잔함이 오래 남는다. “힘든 시대를 굳건하게 살아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서로 농담도 하고 등 두들겨 주면서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그게 사람 사는 모습 아닐까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말의 맛깔스러움을 살려 준 유해진씨의 힘이 컸어요.”

엄 감독은 윤계상에게서 “정환의 곧은 심지와 멋있음”을 발견했다. “시나리오 쓰던 즈음 우연히 윤계상씨 기사를 봤어요. 문득 출연작이 궁금해져서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작품에서 어려운 역할들을 하셨더라고요. 작품 목록에서 윤계상씨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의지를 읽을 수 있었어요. ‘멋있다’고 느꼈죠. 극중 정환처럼요.”

‘말모이’는 화려하진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말모이’는 화려하진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제법 묵직한 이야기를 영화는 쉽고 편안하게 풀어낸다. ‘좋은 글은 말하듯 쉽게 쓴 글’이라고 하듯 영화도 그렇다. 치장을 덜어낸 담백한 연출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에도 꼭 어울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지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엄 감독은 “멋 부릴 수 있는 이야기도, 멋 부려서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의식적으로 보여주기식 연출은 자제했다”며 “화려한 백화점보다 시장통 국밥집 같은 영화가 되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유해진과 윤계상은 이런 엄 감독을 두고 “뚝배기 같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말모이’는 관객과 만나야 오롯하게 완성되는 영화다.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말이 모인다는 의미인 말모이는 촛불 정신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시대극에선 동시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돼요.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던 2016년엔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람의 가치가 무시당하고, 모두가 무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실패와 좌절은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시대였죠. 영화 속 판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도 매우 귀한 존재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엄유나 감독은 “어떤 영화든 장르보다 이야기가 먼저”라며 “차기작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김혜윤 인턴기자
엄유나 감독은 “어떤 영화든 장르보다 이야기가 먼저”라며 “차기작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김혜윤 인턴기자

영화는 때로 세상을 바꾼다. ‘택시운전사’ 개봉 이후에 실존 인물 김사복씨의 존재가 밝혀지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힌츠페터의 헌신이 재조명됐다.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에도 힘이 실렸다. 엄 감독이 ‘말모이’에서 기대하는 변화는 무얼까. “‘택시운전사’ 때도 꼭 영화 때문에 그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말모이’를 본 관객들이 ‘욕을 안 하겠다’거나 ‘신조어를 덜 쓰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다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말모이라는 단어를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교 시절 엄청난 영화광이었던 엄 감독은 이과생이었음에도 영화 감독을 꿈꾸며 동국대 영화과에 진학했다. 졸업 뒤 ‘국경의 남쪽’(2006) 연출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추격자’(2008)에선 스크립터로 일했다. 이후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데뷔는 늦었지만 경험과 실력을 갖춘 인재다. 자본의 성 차별이 심한 충무로에서 여성 감독임에도 상업 영화로 데뷔하는 매우 귀한 기회도 얻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끊임없이 작업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요. 나이 들어서도 현장을 지키며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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