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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장 편안한 스웨터

입력
2019.01.1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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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했다면서요? 전세금 1억 넘었어?

다짜고짜 선배가 묻는다. 만날 때마다 무슨 의례처럼 시작되는 대화다. 많아야 1년에 서너 번 얼굴 보는 선배라 그렇게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느끼는 심정적 거리로는 그렇게 멀다고도 할 수 없다. 선배가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했다가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럼요. 1억 넘은지가 언젠데요. 짐짓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에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렇구나. 나도 2억 넘은지 오래 되었어요. 왠지 조마조마해 하며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 이른바 ‘도토리 키 재기’식 우스갯소리가 마무리된다.

해 넘어 가기 전에 얼굴 보고 점심이나 한 끼 먹자고 모인 자리였다. 소설가 셋, 시인 하나였다.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지 며칠 안 되는 또 다른 선배가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협곡 같은 잿빛 건물들 사이, 체감 온도 5,6도는 쉽게 낮춘다는 빌딩풍을 맞으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해물탕 맛집, 동태찌개 맛집을 열심히 검색한 것도 헛되이, 우리는 우연히 눈에 띈 조촐한 식당에 들어왔다. 대구탕 중간 크기를 주문했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물색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식탁 위 가스버너가 켜지고, 푸른 쑥갓을 척척 얹은 대구탕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두툼한 겉옷을 벗었다. 나의 맞은편에는 이제 2억이 넘는 전셋집에 살고 있는 선배가 앉아 있었다. 살이 전혀 붙지 않은 마른 몸, 흰머리도 많고 주름도 많은 선배는 그럼에도 여전히 청년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청록색 스웨터 때문인가. 나는 유심히 선배를 살펴보았다. 털실로 짠 옷을 오래 입으면 그렇듯 스웨터에는 눈에 띌 정도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하고 환해진다. 선배의 옷에만 새겨진 특별한 무늬를 내가 훔쳐보고 있는 것 같다. 선배는 아마도 자기 옷에 보풀이 일었는지 밥풀이 묻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옷차림을 점검하는 사람이다. TV홈쇼핑 채널에서 ‘어느 모임에나 자신 있게 입고 나갈 수 있는 백퍼센트 캐시미어 니트’를 발견하면, 그걸 사지 못해 마음이 들끓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런 내가 지겨워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구탕은 시원했고, 너무 짜지도 맵지도 않았다. 심지어 MSG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네 사람밖에 없었다. 휑한 벽에 소주 광고 포스터와 메뉴판과 달력이 붙어 있는, 하나도 특별할 게 없는 식당이었다. 밖에서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이 없어, 우리는 국물을 덜고 생선살을 발라 먹으며 1년 동안 살아낸 이야기를 한갓지게 나눌 수 있었다. 아들이 취직한 것을 자랑했고, 외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신기함을 전했다. 가난에 대한 소설가들의 푸념이 길게 이어지자, 어떻게 시인 앞에서 소설가들이 가난을 이야기 하느냐는 반격이 들어왔다. 살짝 쓸쓸한 웃음 끝에 청록색 스웨터를 입은 선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도 나는 소설가로 살아서 좋았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소설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가난하지 않은 시인이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손사래 치며 만류하는 소설가들을 향해 시인이 말했다. 아, 진짜, 너무들 하네. 나 상 탄 것 몰라요?

집에 돌아오면서 선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긴 글을 써야 해요. 장편을 써야 소설가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고리타분한 잔소리.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낡아서 가장 편안해진 스웨터를 입고, 그래도 소설가로 살아서 좋았어, 라고 청년 같은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기는 할 것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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