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20대 두 딸이 있는 주부에요. 첫째는 취업을 준비 중이고, 둘째는 아직 대학생입니다. 지난해 남편이 첫째를 본인 회사에 취직시키려다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됐습니다. 그 일을 반대했던 저는 남편과 많이 다퉜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질 않던 남편과 정신과 상담을 받았는데, 남편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남편이 사회생활에서는 신속한 추진력과 판단력 등의 장점이 있지만 가정에서는 독단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너무 놀랐지만, 그간 저를 힘들게 했던 남편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남편은 평생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왔고, 자신을 돌아볼 줄도 모르고 미안해할 줄도 모릅니다. 일주일 내내 음주가무를 즐기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러 갑니다. 가족을 돌보기는커녕 외식할 때도 혼자 빨리 먹고 나가버립니다.
제가 괴로운 것은 두 딸도 남편과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 하고 싫어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지 않고 늦잠을 자고, 방도 치우지 않습니다. 감정 변화도 극과 극으로 치닫고 분노 조절도 잘 안됩니다. 결국 제가 잔소리를 쏟아내게 됩니다.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둘째는 마음대로 외박하고, 학교 공부도 하지 않아 학사경고를 받았습니다. 엄마로서 안타까워 잔소리를 하면 아이들은 제게 막말을 하며 길길이 날뜁니다. 심지어 둘째는 첫째에게 저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고, 인연을 끊어야겠다고까지 합니다.
성품은 엉망이지만 아이들은 용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첫째는 영어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영어에 특출한 능력을 발휘해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둘째도 그럭저럭 성적을 받아 대학에 갈 수 있었고요.
하지만 딸의 취업과 결혼을 생각하면 앞날이 캄캄합니다. 용돈 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충동적으로 돈을 씁니다. 통신비가 한 달에 70만원이 나온 적도 있어요. 물건을 사놓고는 금세 잊어버리고 또 다시 산다거나, 처박아 두고 쓰질 않아요.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걱정하면 아이들은 또 큰 소리를 칩니다.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요. 하지만 한번도 저와 한 약속을 지키거나, 실행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된 데는 제 책임도 큰 것 같아요. 큰 아이가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이 아이가 녹색 밭에 붉은 당근처럼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튄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ADHD와 관련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조금 별나다고만 생각해 일찍 개입해 고쳐주지 못한 죄책감도 들어요.
뒤늦게라도 아이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데, 상황은 달라지지 않네요. 남편은 매일 늦게 들어오고, 들어와도 집에서 TV만 보기 때문에 아무런 교감이 없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말만 꺼내면 화부터 내고, 듣질 않습니다. 상담을 받게 해주고 싶어도 제 말은 듣질 않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최성희(가명ㆍ51ㆍ주부)
당신이 딸들의 미래를 매우 깊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딸들이 일을 구하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는 그 모든 미래가 걱정스럽겠지요. 성인으로 다 키워놓은 딸이지만 엄마로서의 애정과 걱정은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딸을 보면 화도 나고, 속이 터지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앞서고, 안타깝고, 가엾기도 하고, 이렇게 된 데에 대한 미안함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포기도 안 되고, 자식이 ‘내버려 두세요. 알아서 할게요’라고 해도 그럴 수가 없지요. 당신은 가족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힘들겠지만 이를 알고 있는 성희씨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먼저 애를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편과 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세 사람은 본인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는 능력보다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 발달되었고 이에 대해 반응하는 속도가 더 빨라요. 예를 들어 딸이 방 정리를 안 하는 것은 딸의 문제에요. 하지만 딸은 그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 엄마가 ‘너 또 방을 안 치웠니’라고 잔소리하는 것만 들려요. 그러면 ‘또 아니거든. 어제는 치웠거든. 엄마는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해?’라고 소리칠 거에요. 방을 어지럽힌 생각은 안 하고 엄마의 말투를 꼬투리 잡죠. 다른 예로 밖에서 놀다가 늦게 왔다고 가정해보죠. 엄마가 ‘뭘 하다가 이제 들어오니’라고 하면 ‘버스가 늦게 왔단 말이야’라고 대꾸해요. 엄마가 다시 묻죠. ‘4시간이나 늦었으면서 버스가 늦게 왔단 게 말이 되니’라고 다그치면 딸은 친구들과 놀게 된 이유 등 다른 이유는 밝히지 않고 ‘버스가 늦게 온 건데, 엄마는 왜 나를 안 믿어줘’라고 할 겁니다. 버스가 평소보다 10분 늦게 온 것도 사실이지만 4시간 늦게 된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 지극히 부분적인 이유거든요. 딸들은 순차적, 체계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충동적이고 주관적으로 문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딸은 생각이나 감정, 욕구 등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생각의 조절이 안되기 때문에 필요한 생각을 꾸준히 유지하지 못하지요. 행동 조절도 어려워요. 문을 쾅 닫는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산만하게 움직여요. 욕구 조절도 안 될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해야 하고,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하고, 사고 싶은 것도 사야 합니다. 일의 중요도를 따져 판단하지 않고 하고 싶은 우선 순위를 정해서 움직여요. 무엇보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에요. 기분이 좋을 때는 더없이 밝고 명랑하고, 친절하지만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분노폭발하고 죽일 듯이 얘기를 할 수 있어요.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충동적이고 순간의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딸이 시간이나 금전 관리에도 취약하다고 하셨지요. 건강관리나 자기관리가 안되고 정리정돈도 안되지요. 어려운 것도 흥미나 관심이 있는 것은 잘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집중하고 몰입해요.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너무 하기 싫어하고 뒤로 미루고, 하라고 하면 화를 내죠. 지루한 것을 못 견디고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하고 떠오르는 순간 바로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마다 성희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을 건넸겠지요. 그런데 딸들은 엄청난 관심과 흥미가 없거나 바로 보상이 없으면 귀찮아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온갖 이유를 생각해내고, 이 과정에서의 생각은 어이없지만 매우 정교하고 다양하고 체계적이지요. 성희씨가 보기에는 마음만 먹으면 잘 할 텐데 말이에요. 인생에서 중요한 내적 동기가 없기 때문에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해야 할 일을 그냥 하는 것이 어렵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안되니까 대충 하고 제대로 다시 하라고 하면 상대방에게 화를 내지요. 떠오르는 대로 막말을 하고 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니 어떨 때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느껴질 거에요. 아무리 말을 해도 그런 것을 인식하기가 두 딸은 버거웠을 거에요.
당신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딸은 자식이라서 엄마 입장에서 포기할 수 없어요. 명백하게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엄마로서 꼭 얘기해주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성희씨는 아마도 정확하고 올곧은 사람일 거에요. 사리분별이 명확해 딸들의 그릇된 행동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을 거에요. 당신은 좋은 의도로 도움이 되라고 한 얘기지만 딸은 자기들이 고쳐야 할 점을 바라보기보다 당신의 말을 트집잡는 데 더 빠르게 대응하지요. 그래서 잔소리를 통해서는 딸의 행동이나 생각을 고칠 수가 없어요.
성희씨, 당신이 딸에게 하는 진심 어린 충고를 딸들이 받아들이려면 소통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과거와 동일하게 똑같이 말하면 서로 평행선만 그리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해야 합니다. 예컨대 방 청소 문제에서 ‘너 또 방 안 치웠니’라고 하기보다 ‘너 방 안 치웠네’라고 먼저 부드럽게 말을 바꿔보세요. 그러면 딸이 ‘저번에 치웠다고요’라고 대꾸하겠지요. 과거에는 ‘네가 언제 치웠니’라고 했다면 이번에는 ‘그래 저번에 치웠으니깐, 이번에도 치웠으면 좋겠다’고 해보세요. 이렇게 해야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대화를 할 수 있어요. 가령 ‘머리 좀 감아라. 며칠 째 안 감았니’라고 하면 딸은 ‘지금 내가 못생겼다고 하는 거지’라며 전혀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여요. 그때 ‘내가 언제 네가 못생겼다고 했니, 머리 좀 감으라고 한 것뿐인데’라고 하면 딸은 ‘그 말이 그 말이잖아’라며 소리를 지를 지도 모릅니다. 이때도 ‘억지로 시킬 수야 없지. 두피건강이 걱정돼서’라고 해보세요.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가 잔소리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이가 더 멀어지기도 해요. 성희씨의 딸들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화와 충고, 지시 전달 방식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해요. 물론 갑갑하지요. 이미 많은 노력을 했을 테니까요. 엄마들에게 잔소리를 덜하라고 하면 ‘그러다 애들이 잘못되면 어떡해요’라고 불안해해요. 잔소리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문제를 겪고 스스로 결과를 경험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때로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해보자고 해야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어요.
서로 대화하다가 결국 감정 조절에 실패해 딸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막말을 성희씨에게 퍼부을 때도 있었을 거에요. 그럴 때엔 아이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딸에 대한 사랑과 초조함 때문에 그 즉시 개입해 지도하려고 했다면 되려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어요. 맞대응 하기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낫지요. 딸들이 진정되면 그때 얘기해야 합니다. 대화법을 바꾼다고 가족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런 노력을 거쳐야 문제점을 인지하고, 균형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거에요. 그래야 딸들도 상담이나 치료를 받고, 변화할 수 있을 거에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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