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주 접하는 지구촌 이슈들 중 하나는 ‘러시아 스캔들’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고, 이 과정에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 캠프의 공모도 있었다는 바로 그 의혹이다. 2017년 하반기부터 작년 상반기까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소식이 쏟아졌던 것과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도 이 사건 관련 외신 보도는 수시로 등장한다. 2017년 5월 지명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아직 수사를 마무리하지 않았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다.
8일(미국시간)에도 의미심장한 뉴스가 나왔다. 트럼프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낸 폴 매너포트가 선거 관련 자료를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계돼 있다는 의심을 받는 인물에게 넘겼다는 내용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뮬러 특검이 내놓을 수사결과 보고서는 아마도 올해 워싱턴 정국을 뒤흔드는 태풍이 될 것이다.
미 대통령직을 노린 ‘검은 커넥션’, 이를 덮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법방해’ 흔적이 드러날 때마다 떠오른 잡생각은 이런 것이다. ‘수사를 참 오래도 하는구나.’ 뮬러 특검의 수사 착수 이후 무려 1년 8개월이 흘렀다. 앞서 진행된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포함하면 2년도 훌쩍 넘었다. 최종 과녁인 트럼프 대통령이 걸핏하면 “빨리 끝내라. 마녀사냥!”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신기한 건 ‘수사 장기화’를 비난하는 언론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국이었다면 ‘무리하게 질질 끄는 수사’라는 비판적 보도가 넘쳐났을 텐데 말이다.
물론 형사사법 시스템이 상이한 두 나라의 ‘수사 기간’을 동일선상에 두고 따지긴 힘들다. 예컨대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특검 활동 기간을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참고로 1973~2003년 총 16차례 꾸려진 미국 특검의 평균 수사기간은 1,154일이다). 러시아 스캔들 수사는 ‘세계 최고 권력자’를 겨눈다는 점, 미 주류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 등도 고려할 변수다. 그렇다 해도 권력형 부패, 대기업 비리 수사가 3~4개월만 넘어가면 ‘과잉 수사’ 비판이 들끓는 한국과 비교해 미국 사회가 ‘뮬러 특검 20개월’에 보여준 관대함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건 단지 “검찰이 아니라 특검이니까 그렇다”는 논리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경험칙상 ‘수사 장기화 우려’라는 프레임의 진원지는 형사처벌 위기에 처한,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강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과 돈을 위해서라면 법 따위는 무시했던 그들은 수사선상에 오를 경우, 증거인멸과 말 맞추기, 거짓 진술로 일관한다. 수사는 지연되고, “이렇게 오래 수사하는 건 좀 심하지 않냐”는 반격이 곧이어 시작된다. 적반하장 격이지만, 이 프레임은 언론과 시장, 여론에 꽤 잘 먹힌다(사실 이것도 문제다). 이 사회가 검찰을 믿지 못하는 탓이다. 범죄 자체가 아니라, 정권 입맛에 맞추어 정한 타깃은 무조건 잡아넣겠다는 식으로 ‘먼지 털이 수사’를 일삼았던 검찰의 자업자득이다.
결국 문제는 신뢰요, 여론이다. 1973년 당시 미 법무장관이던 엘리엇 리처드슨은 “(워터게이트를 수사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검을 해임하라”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부장관이었던 윌리엄 러클샤우스도 같은 선택을 했다. 뮬러 특검 수사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한테 미운털이 박힌 끝에 지난해 11월 경질된 제프 세션스 전 법무장관도 비슷한 경우다. 그들은 ‘대통령 보호’보다 ‘수사의 독립’과 ‘법의 지배’라는 가치를 우선시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수사가 더디게, 오랫동안 진행되더라도 ‘믿고 지켜보자’는 인식이 사회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9일 공개된 한국 검찰의 민낯은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운 수준이다. 2008년 PD수첩 수사 당시 검찰 수뇌부는 수사팀에 “기소와 무관하게 체포하라”, “무죄 나와도 좋으니 기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러니 ‘거악(巨惡)을 척결하겠다는데, 수사 기간이 대수겠는가’라며 검찰을 응원할 국민이 있겠는가.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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