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독감, 올 겨울 독감
지난 주말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아직 잠들어 있는 아이 얼굴을 쓰다듬자 손에 ‘감’이 왔다. 따끈따끈한 느낌에 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체온계 숫자는 37.1~37.2도. 약을 먹이기도, 그냥 두기도 애매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탔지만, 평소와 달리 피곤해했던 아이의 전날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퇴근 후 만난 아이는 다행히 멀쩡했다. 밖에 나가 축구도 했고 농구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체온은 다음날 아침까지 안심할 수 있는 범위로 내려가지 않았다. 동네 이 집 저 집 아이들이 A형 독감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조바심이 났다. 혹시 춥거나 목이 아프거나 하면 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아이 가방 안에 약을 챙겨 넣어주고 출근했다. 일하는 엄마인 게 가장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전국에 A형 독감이 유행하고 있다. ‘A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특별한 독감처럼 여겨지지만, 이번 바이러스가 예년과 크게 다른 건 아니다.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독감 바이러스는 특성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뉜다. A형은 단백질의 구조에 따라, B형은 최초 검출 지역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지난해 9월 2일부터 12월 22일까지 환자에게서 검출한 독감 바이러스를 분석한 결과 A형 H1N1 바이러스가 76.6%로 가장 많았고, A형 H3N2가 23.4%였다. B형 야마가타계열 바이러스는 전체 독감 바이러스 465건 중 1건만 검출됐다.
이웃 아이들 가운데는 올 겨울 독감 백신 접종을 거른 경우가 적지 않다.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지난 겨울 백신을 맞혔는데도 독감에 걸려 이번에는 굳이 접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이유가 많았다. 초등학생은 무료로 접종할 수 있는데도 맞히지 않았다는 건 백신에 대한 엄마들의 신뢰가 높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올 겨울은 지난 겨울과 독감 유행 양상이 다르다.
독감 바이러스는 다른 바이러스보다 유전자 변이가 훨씬 잘 일어난다. 어디서나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생존전략이다. 다만 변이 빈도는 바이러스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A형 중에선 H3N2가 H1N1보다 변이가 더 쉽게 일어난다. 주로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12~1월엔 A형이, 2~4월엔 B형이 세력을 떨친다.
2017년 9월 3일부터 12월 30일까지 질병관리본부가 검출한 독감 바이러스는 B형이 54.1%, A형 H3N2가 39.1%, H1N1이 6.8%였다. 지금은 유행하는 주요 A형 바이러스가 H1N1지만, 지난 겨울 비슷한 시기엔 H3N2였다는 얘기다. 더구나 지난 겨울엔 이례적으로 A형과 B형 바이러스가 함께 유행했다. B형 독감이 A형보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가볍게 지나간다는 걸 감안하면, 지난 겨울과 올 겨울 유행 독감 차이의 핵심은 주된 A형 바이러스가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겨울과 이번 겨울용 독감 백신은 H1N1과 H3N2에 모두 작용한다. 다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H1N1은 백신 접종 효과가 높은 편이지만, H3N2는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백신 제조업체들은 매년 2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유행을 예측해 권고하는 바이러스 유형을 넣어 백신을 만든다. 그런데 백신을 제조하는 6개월 동안 자연 상태의 H3N2가 변이를 일으키거나, 백신에 넣기 위해 계란이나 세포에서 키우는 H3N2가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WHO가 유행을 예측한 H3N2, 백신에 들어 있는 H3N2, 실제 유행하는 H3N2의 유전자가 조금씩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H3N2는 백신 효과가 낮게 나타날 수 있다. 백신으로 몸에 들어온 H3N2 바이러스에 맞춰 면역 기능이 준비됐는데, 막상 겨울이 되니 백신의 H3N2와는 좀 달라진 H3N2가 침투하면 면역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겨울 백신을 맞았는데도 독감에 걸렸다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올해 주로 유행하는 독감 바이러스는 H1N1이다. 백신의 H1N1과 실제 유행하는 H1N1은 비슷해 미리 형성된 면역기능이 독감 발병을 막아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주 만나기로 약속한 아이 친구가 갑작스런 고열로 병원에 갔더니 A형 독감 진단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 친구는 백신을 맞지 않았다. 반면 우리 아이의 체온은 하루가 더 지나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미열 때문에 체온이 오르락내리락 했던 게 독감 바이러스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추워지기 전 백신을 맞힌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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