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 폭로 후 문체부 “가해자 처벌 강화” 발표
폐쇄적 문화 여전해 실효성 의구심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력에 시달렸다는 심석희(22)의 충격적인 폭로가 나온 뒤 정부가 황급히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실효성이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심석희는 8일 변호인을 통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4년부터 조 전 코치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심석희는 국가 체육시설인 태릉과 진천선수촌 라커룸에서도 수시로 범행이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어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9일 다른 일정을 취소한 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체육계 성폭력 가해자 처벌 강화를 약속했다. 지금까지는 강간, 유사강간 및 이에 준하는 성폭력만 영구 제명했는데 앞으로 ‘중대한 성추행’도 포함한다. 문체부는 성폭력 관련 징계자의 국내외 체육관련 단체 종사 금지 등의 방안 대책도 내놨다. 허술한 규정을 이용해 해외 취업을 시도하거나 몇 년 후 슬그머니 민간에서 활동을 재개하는 걸 막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체육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원인을 둔 성폭력이 이런 대책들로 뿌리 뽑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선수는 지도자 앞에서 철저히 ‘을’인 게 한국 체육의 현실이다. 지도자 눈 밖에 나면 선수 생명 자체가 위태로워져 피해 사실을 섣불리 드러낼 수 없다. 심석희처럼 특정 코치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지도하는 구조에서는 ‘사제관계’가 종종 ‘주종관계’로 변질되기도 한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 폭로해도 선후배로 엮여 있는 인사들이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공고한 카르텔 속에서 피해자들의 침묵이 대물림 됐다.
리듬체조 국가대표 이경희 코치는 체조협회 간부에게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했다고 2014년부터 탄원서를 내며 호소했지만 가해자는 사표 제출 후 2년 만에 다시 체조협회 고위직에 선임됐다. 인준은 거부됐지만 체육계의 추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례였다.
노 차관은 “폐쇄적인 문화를 탈피하는 과정이 힘들고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지속적이고 강력한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고 스포츠 문화 변화를 위한 교육도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2010년부터 2년 주기로 아마추어 종목에 대한 성폭력 실태를 파악해 보고서를 내고 있지만 이 역시 실질적인 후속 조치 등이 뒤따르는 방식으로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체육회는 공교롭게도 심석희의 폭로가 있던 8일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일반 등록선수 및 지도자, 국가대표 선수 및 지도자의 성폭력 경험 비율은 각각 2.7%와 1.7%였다. 체육회는 일반 등록선수 및 지도자의 경우 2010년 26.6%에 비해 크게 줄었다고 자화자찬 했지만 국가대표 선수 및 지도자는 2016년 1.5%에 비해 오히려 조금 올랐다. 또한 심석희 사례에서 보듯 조사에 담기지 않은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체육회는 지난 해 미투 운동을 거울 삼아 이번에는 국가대표 강화훈련에 참가한 국가대표 선수 및 지도자 791명 전원을 대상으로 별도 전수 조사를 처음 실시했다고도 의미를 부여했다. 선수촌을 직접 찾아가 무기명 설문을 받는 방식이었다. 체육회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실태 조사라 피해 사례를 접수한 뒤 상담, 해결로 이어질 수는 없다”며 “대신 설문지를 돌리기 전 선수들에게 신고 절차를 상세히 안내해 피해를 당했을 경우 적극 신고하도록 독려한다. 작년부터 인권상담사가 선수촌을 한 달에 1~2번 방문하는 ‘찾아가는 인권센터’도 운영 중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심석희는 이런 창구를 이용하지 않았다. 인권센터가 선수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노 차관 역시 “지금까지 실태조사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그간 정부와 체육계가 마련해왔던 제도와 대책들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고개를 숙인 뒤 “체육계가 아닌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서 대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앞으로 실태조사를 체육계가 아닌 민간 주도로 하고 체육 분야 제도 개선에 인권 전문가들을 포함하는 등 문제를 ‘체육계’ 밖에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체육회 관계자도 “실태 조사에만 그치지 않도록 다른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고 공감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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