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금등지서와 화성 건설

수원 융릉. 사도세자(장조의황제)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의 무덤이다. 원래 명칭은 현륭원이었으나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명칭을 바꿨다. 문화재청 제공
◆채제공의 사도세자 관련 상소

‘정감록’에 “진인이 남쪽에서 나오고, 도읍을 화산(花山)에 정하면 백성이 세금과 부역을 면하고 깃발이 길을 덮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연이었겠지만 정조가 기획 중이던 신도시의 이름이 하필 화산(지금의 화성시)이었다.

1792년 겨울, 다산이 작성한 화성 건설의 청사진이 올라오자, 이듬해인 1793년 1월 12일에 정조는 채제공을 수원부 유수(留守)로 임명했다. 정조는 화성 건설에 앞서 수원부를 수원유수부로 승격시켰고, 초대 유수에 채제공을 임명한 것이다. 유수란 임금이 제 2의 수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곳에 머물며 지키게 하는 제도에서 나온 명칭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수원부는 이때 특별시로 승격된 셈이다. 밑그림이 나왔으니,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반 시설과 시스템을 정비하라는 뜻이었다.

1793년 4월에 다산이 다시 기중가와 유형거 등 기계와 각종 세부 내용을 적은 20조에 걸친 보고를 올리자, 5월 25일 정조는 수원에 내려가 있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5월 28일에 서울로 올라온 채제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자 처벌을 정면으로 제기한 상소문을 올렸다.

오랜 금기를 깨고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문제의 공식적 처리를 영의정이 직접 왕에게 건의한 것이다. 정조와 합을 맞춘 행보가 분명했다. 당시 채제공은 74세의 고령이었다. 채제공과 함께 좌의정에 임명된 노론의 김종수가 격렬하게 반발하며 사직을 청했다. 정조는 짐짓 진노하며 채제공의 상소를 비답과 함께 돌려보냈고, 채제공이 다시 글을 올리자,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고 마음이 오싹해진다”며 한 번 더 돌려보냈다. 결국 6월 4일에 채제공과 김종수는 함께 파직되었다.

◆아! 금등

이후로도 채제공의 상소를 둘러싼 공방은 지속되었다. 노론 강경파의 공격은 날로 독해져서 결국 채제공에게 큰 죄를 묻고서야 끝낼 기세였다. 1793년 8월 8일, 정조는 2품 이상의 관원을 소집했다. 임금은 근자의 좋지 못한 꼴들에 대해 말하겠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단도직입으로 채제공의 상소문에서 죄 삼을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었다. 서슬이 심상치 않자 영의정 홍낙성과 좌의정 김이소 등이 채제공의 원래 상소를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한발 물러섰다.

임금이 말했다. “법을 범한 것이 있으면 누구든 처벌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채제공이 감히 말하지 못할 일에 대해 말한 것은 곡절이 있다. 그가 도승지로 있을 때 선대왕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을 물리친 뒤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사도세자의 신위(神位) 아래 깔아둔 요 속에 간수하게 한 일이 있다. 이는 채제공만 아는 사실이라 그가 죽음에 임박해 이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른바 금등지서(金縢之書)로 불리는 영조의 글을 파격적으로 공개했다. 왕이 펴 보인 쪽지에는 모두 20자가 적혀 있었다.

피 묻은 소매, 피 묻은 소매여!

누가 안금장(安金藏)과 전천추(田千秋)인가.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내가 망사지대(望思之臺)를 후회하노라.

(血衫血衫 혈삼혈삼, 孰是金藏千秋 숙시김장천추. 桐兮桐兮 동혜동혜, 余悔望思之臺 여회망사지대.)

“사도세자의 피 묻은 적삼, 누가 과연 충신인가? 오동나무로 짠 뒤주. 나는 세자 죽인 일을 후회한다.” 영조가 사도세자 신주 아래 깔아둔 요의 솔기를 뜯고 그 안에 간직하게 했던 진짜 속내가 이렇게 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오랫동안 칼집에 들어있던 칼이 스르렁 소리를 내며 빠져 나오자, 대신들은 심장과 뼈가 다 덜덜 떨렸다.

◆나는 후회한다

금등(金縢)은 비밀문서를 쇠줄로 묶어 단단히 봉해 넣어둔 상자를 일컫는 말이다. 개봉할 수 없는 문서란 의미다. 금등지서에 적힌 두 구절은 고사가 있다. 당나라 때 안금장(安金藏)과 한나라 때 전춘추는 충성스런 간언으로 이름 높던 신하였다. 또 한나라 무제는 강충(江充)의 참소로 여태자(戾太子)를 죽였다. 나중에 무고인 것을 알게 된 무제가 강충의 일족을 멸하고, 태자 죽인 일을 후회하여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세웠다.

그러니까 금등지서에 적힌 내용의 의미는 이러했다. “내 아들 사도세자가 간신의 모함으로 오동나무로 짠 뒤주에 갇혀 원통하게 죽었다. 이를 위해 바른 말로 간언할 안금장과 전춘추 같은 신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한 무제가 죽은 아들을 위해 세웠다는 귀래망사지대를 생각하면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청천벽력의 말씀이었다. 생전에 사도세자는 홍계희를 임금과 세자를 이간한 강충과 같은 인물로 지목하여 비판한 일이 있었다. 노론 벽파는 금등지서 속에서 귀래망사지대의 언급을 접하고는 깊은 충격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동안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정조가 자신의 심경을 더 길게 설명한 후,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오늘 내가 분명하게 밝힌 것은 ‘서경’ 속 ‘대고(大誥)’의 뜻을 모방하여 사람마다 깨달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이제부터 다시 어지러운 일을 빙자하는 자가 있으면 사람마다 얻어 이를 처벌하리라. 오늘 이후로 이 일을 밝게 천명하는 책임은 오로지 경들에게 달렸다.”

영조의 친서가 전격적으로 공개되면서 들끓던 조정 여론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채제공의 처벌을 외치던 논의도 쑥 들어갔다. 이튿날 정조는 보란 듯이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셔둔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했다.

1792년 윤 4월과 5월, 2차에 걸친 영남만인소가 사도세자 문제의 금기를 허물었고, 1793년 5월 채제공이 올린 상소를 기폭제 삼아, 그 해 8월 정조가 영조의 금등지서를 공개하면서 사도세자 복권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최득현이 그린 ‘화성성묘전배도’(1795). 1795년 윤2월 1일 정조가 화성 현륭원에서 사도세자의 묘를 성묘하며 절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수원화성 첫 삽을 뜨다

1794년 1월 1일, 새해 첫날 경모궁을 찾은 정조는 슬픈 심정을 가누지 못해 아예 흐느껴 울었다. 1월 4일, 화성 성역(城役)의 길일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성터 닦기는 1월 25일에, 문루(門樓) 공사 착공은 2월 16일로 정해졌다.

현 수원시 화서동에 자리한 숙지산(孰知山)에서 엄청난 석재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면서, 1월 7일, 석재를 뜨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길일을 잡아 택한 날이었다. 이곳은 지명이 공석(空石)이었고 산 이름은 숙지(孰知)여서, 둘을 합치면 ‘성을 쌓느라 채석해서 돌이 텅 비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느냐[孰知]’로 풀이 되었다. 정조는 이 우연마저도 하늘이 암묵 중에 돕는 것이라 여겨 감탄하며 기뻐했다. 출발의 조짐이 아주 좋았다.

1월 13일에 정조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를 건너 현륭원에 행차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 앞에 나아가 절을 할 때 잔을 올리고는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었다. 나중엔 호흡이 곤란해질 지경까지 가서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렀다.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황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수십 년 마음에 맺힌 한을 풀게 될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하니 마음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1월 25일에 팔달산에서 화성 성역의 성공을 기원하는 고유제와 함께 성터 닦기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망치질 소리와 수레 끄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거운 돌을 실은 수레가 다산이 발명한 유형거에 실려 속속 도착했다. 기중가는 운반된 돌들을 높이 쌓기 시작했다. 안면도에서 실어온 해송도 연이어 운반되어 왔다. 워낙 기본 계획과 장비 문제가 야무지게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탈상과 정계 복귀

1792년 4월 9일,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2주기를 맞았다. 6월 27일에 초천에 내려가 담제(禫祭)를 지낸 뒤 복을 벗고 공식적으로 상을 마쳤다. 격랑의 2년간을 다산은 정계에서 빗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인의 행동 대장이었고 돌격 대장이었다. 명례방에 있던 그의 집은 젊은 남인 정객들의 아지트였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 묘한 기사가 하나 나온다. 예전 1775년 당시 홍인한이 재상으로 있을 때 세손 정조에게 ‘삼불필지(三不必知)’ 즉 조정의 논의와 관리 임용, 그리고 나라 일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알아서 다 할 테니 나라 일에 아예 신경 끄라는 망발이었다. 1793년 겨울 이 문제가 재점화 되면서 당시 세손을 위해 영조에게 바른 말로 아뢨던 성정진을 불러 당시의 앞뒤 정황에 대해 공술(供述)을 받았다. 성정진이 사실대로 아뢰자, 홍수보는 성정진에게 “이제 네가 거실(巨室)에 죄를 얻었다.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었다. 노론의 노여움을 얻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홍수보는 이 말을 한 일로 죄를 성토 당했다. 이때 처삼촌인 홍수보를 성토하는 통문 작성을 바로 다산이 주도했다고 ‘눌암기략’은 적고 있다.

한참 다산의 명례방 집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판서 홍수보를 성토하는 통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당사자인 홍수보가 다산의 집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사랑채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다산은 당황해 급히 홍수보를 안채로 안내했다. 처삼촌이어서 그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통문은 마무리 되었는데, 홍수보만 그 같은 사정을 까맣게 몰랐다.

또 ‘사암연보’에는 1794년 당시 홍수보의 아들 홍인호가 한광보(韓光溥)에게 채제공이 올린 상소문의 표현 중에 망발이 많다고 비난한 일로 남인들이 일제히 홍인호를 공격한 내용이 나온다. ‘사암연보’는 이때 홍인호가 자신의 사촌 처남인 다산이 자신을 비난하는데 주동이 되었다고 의심해서 두 사람이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썼다. 다산 자신은 사실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눌암기략’이 남인들의 논의가 ‘명례방 모임[明禮之會]’에서 이뤄졌다고 못 박은 것을 보면, 다소의 오해와 과장은 있었겠지만 다산이 이 일에 직접 관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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