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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야학 만든 내 친구 기순아” 40년 마음의 빚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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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야학 만든 내 친구 기순아” 40년 마음의 빚 갚았다

입력
2019.01.16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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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 쓴 송경자씨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인 

 故 박기순 열사의 삶을 복원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 쓴 송경자 작가. 송 작가 제공/2019-01-09(한국일보)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 쓴 송경자 작가. 송 작가 제공/2019-01-09(한국일보)

“그동안 기순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이제야 갚은 느낌입니다.”

올해 초 광주ㆍ전남지역 최초 노동자 야간학교인 ‘들불야학’ 창립자이자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고 박기순(1957~1978)열사 평전을 낸 송경자(사진)씨는 지난 8일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40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에게 책을 바치며 함께 미안한 마음도 전했다.

'스물두 살 박기순' 책 표지. 작가 제공/2019-01-09(한국일보)
'스물두 살 박기순' 책 표지. 작가 제공/2019-01-09(한국일보)

송 작가는 박 열사와 전남여고 동기동창이자 1976년 전남대에 입학해 독서모임 루사(RUSA)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이자 동지다. 1978년 12월 연탄가스사고로 친구를 잃은 송씨는 대학 졸업 후 신문기자와 대학 홍보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늘 마음에 빚을 안고 살았다.

특히 2013년 ㈔들불기념사업회가 마련한 박기순 추모제에 참가했다 ‘들불7열사’ 가운데 박 열사만이 평전이나 전기 등 기록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가슴앓이를 하다가 지난해 40주기를 맞아 평전을 내게 됐다.

박 열사는 전남 보성군 노동면 죽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전남여고를 거쳐 전남대 국사교육과에 진학해 사회과학모임인 루사에 들어가면서 노동운동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듬해엔 광주 동구 산수동 노인회관에서 주변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모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꼬두메 야학’을 운영했다. 꼬두메는 마을 이름이다.

박 열사는 1978년 6월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과 연관돼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강제 휴학을 당했다. 이후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운동보다 노동운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학교를 떠났다. 같은 해 7월 23일 광주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들불야학을 창립했다. 노동자의 가난과 고통의 원인이 교육을 못 받아 무능하기 때문이 아닌 모순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들불야학을 연 뒤 그 해 10월 야학 인근 광천공단 한 금속회사에 입사에 노동자로 변신했다. 1982년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영혼결혼식을 올린 윤상원 열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들불야학 강학(교사ㆍ가르치며 배운자)으로 참여시킨 것도 이때다.

송 작가는 “기순이는 대학생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노동자가 된 사람이다. ‘노동자의 누나’가 아니라 노동자로 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 박 열사를 ‘광주지역 최초 위장취업 1호’라고 하는데 대학생 위장취업이 아니고 진짜 노동자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들불야학을 이끌며 억세게 살았던 박 열사는 그 해 12월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송 작가는 불꽃처럼 살다간 박 열사의 삶의 궤적을 가족, 고교ㆍ대학 친구, 루사 회원, 학과동문, 들불야학 강학 등 80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복원했다. 스물두 살의 짧은 삶의 흔적은 지난 40여년 동안 거의 사라지고 없었기에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사진 등으로 퍼즐을 맞추듯 추적했다. 만나지 못한 지인들은 이 메일과 전화 등으로 인터뷰를 했다.

박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100여명의 이름과 학과, 학번은 물론 당시에 오간 말과 행동을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책을 썼다. 평전에는 70~80년대 광주 운동권 인사들의 모습이 활동사진을 보는 듯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송 작가는 책의 부제로 ‘1978년 광주와 들불야학’이라고 쓴 것은 그 해가 광주사회에 엄청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3월에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가 창립되고, 4월과 6월에는 전남 함평고구마사건과 전남대 교육지표사건이 터지고, 7월에는 들불야학이, 11월에는 지역 최초의 민주여성 단체인 송백회가 창립됐기 때문이다. 문화ㆍ농민ㆍ교육ㆍ야학ㆍ여성운동이 동시에 일어난 해이다.

그는 “78년 광주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들불야학은 강학과 학강(학생ㆍ배우면서 가르친자)들이 80년 5월 민중항쟁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의 초석되었다”고 말했다.

송 작가는 “들불야학의 정신과 오늘날 촛불정신이 연결된다”며 “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 등에 대한 연구가 계속돼 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평가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종구 기자 sor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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