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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작심열흘 서른다섯 바퀴

입력
2019.01.09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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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흐레다. 작심삼일이 세 바퀴 도는 날이 온 것이다. 연말연초에 덜 바쁜 직장이 있고 더 바쁜 직업이 있을 텐데, 송무변호사는 연중보다 연초에 한가한 편이다. 12월 말과 1월 초에 법원이 재판을 열지 않는 휴정기가 있는데다 법원과 검찰의 인사이동도 있어서 전체적으로 재판이 적어, 이맘때가 일 년 중 가장 여유롭다. 달리 말하면, 12월 말이나 1월 초를 기준으로 일 년 계획을 세우면 지키기가 어렵다.

그래도 새해 기분을 내느라 뭔가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고 만다. 이번에도 그랬다. 12월 말, 날마다 5분에서 10분이면 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정하면 잘 지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야 만 것이다. 설마 이건 하겠지 싶은 목표를 쓰기 시작했다. ‘오전 열 시 삼십 분 전에 일어나기’. 아홉 시 삼십 분도 아니고 열 시 삼십 분. 직장생활을 하는 이상, 못 지키기가 도리어 쉽지 않은 목표다. ‘스트레칭 시늉이라도 하기’. 그렇다. 스트레칭을 한다는 목표는 못 지킬 것 같지만, 스트레칭 시늉은 누워서 손목만 까딱여도 할 수 있다.

이것저것 쓰다 보니 혼자 연말연시 흥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어 오늘의 퀴즈’ 풀기. 모 포털 사이트 중국어사전은 날마다 단어 문제를 5개씩 제공하는데, 아주 어렵지 않은데다 객관식이다. ‘사활 한 문제라도 풀기’. 한 문제라도. 요즈음은 좋은 바둑 사활 애플리케이션이 많다. 한 문제라면, 휴대폰만 손에 쥐고 있으면 화장실에 앉아 있는 짬에도 풀 수 있다.

목록이 길어진다. ‘중국어 쓰기 노트 한 페이지 하기’. 이건 십오 분 정도는 걸리겠지만, 단순작업이다. ‘날마다 중국어 다이어리 채우기’. 여기까지 쓴 다음에, 하나하나에 걸리는 시간을 다 더해 보았다. 한 시간이 안 된다. 그래, 날마다 한 시간 여유도 없을까. 2019년은 이거다! 나는 새해 일일 목표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날마다 그날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 보기로 했다. 이건 누워서 자기 전에 생각하면 되겠지.

처음 며칠은 쉬웠다. 그러나 새해 첫 주말, 첫 위기가 왔다. 토요일 밤에 (물론 다음 날 낮에 봐도 되는) 드라마를 보다가 늦게 잠들고, 일요일 아침에 11시 30분에 일어나 버린 것이다. 아아, 이래서 열 시 삼십 분을 목표로 잡았는데! 애당초 이 목표는 주말을 고려한 꼼수였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내가 열 시 반에는 일어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낙담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계획 하나를 못 지켰다고 다른 것도 포기하면 다 무너진다. 비장하게 나를 다독이며 얼른 사활 문제와 중국어 퀴즈를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시늉만 했건만, 오래 누운 사이 굳은 목과 어깨가 깨우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다. 이날 밤에는 짧은 여행으로 외박을 했는데, 중국어 교재와 다이어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겨우 다 썼다.

월요일. 휴정기가 끝났다. 일어나자마자 얼른 중국어 퀴즈와 사활 문제를 풀었다. 중국어 다이어리는 ‘쓴다’가 아니라 ‘들고 다닌다’를 목표로 했어야 했다. 외근 많은 직업이라 짐스럽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밤에 침대에 눕고서야 중국어 쓰기 노트 생각이 났다. 이어 칼럼 마감 생각이 났다. 아, 어떻게 하지. 일단 다 외면하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괴로워하다보니 새벽 두 시가 되었다. 또 얼른 자정에 업데이트된 중국어 퀴즈와 사활 문제를 풀었다. 작은 목표가 모여 태산같이 큰 목표들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언니를 잘 아는 동생이 보낸 안마기가 도착했다. 손을 집어넣고만 있으면 된단다. 좋아, 열한 시 반 기상과 안마기 15분으로 목표를 바꾸자. 1월 10일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이걸 35번 더 하면, 2020년이다. 와 신난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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