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독재의 억압과 경제 개발ㆍ산업화의 갈등기에 한국의 명랑만화가 번성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탈정치의 이른바 건전문화 콘텐츠로 전제적 국가권력이 명랑만화를 권장ㆍ용인하기도 했지만 억눌린 일상에도, 아니 그래서 더 시민들은 웃음을 원했고, 작은 유머에도 크게 반응했다. 웃음이 당장은 현실을 견디는 힘을 주지만, 그 안에 웃음을 짓누르는 현실을 전복시키는 힘이 함께 내장돼 있다는 사실도 시민들은 웃음을 통해 배웠다. 즉 70년대 명랑만화의 인기는 만화의 문화적 생명력과 유머의 불가항력적 저력을 대변하며, 폭발적 인기와 동시에 가장 느리고 또 영리하게 저류(底流)한 민주화의 에너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흐름을 앞장서 만들고 이끈 이로, 만화가 길창덕(1930.1.10~ 2010.1.30)이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꺼벙이’가 1970년 ‘만화왕국’을 통해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름처럼 여러모로 어리숙하고 엉뚱하지만 순하고 착한, 사회적으로 완벽히 무해한 초등학생 꺼벙이와 여동생 꺼실이의 에피소드를 중심에 두고 도시 서민의 생활상을 함께 그린 ‘꺼벙이’는 캐릭터 자체로서 변화하는 가치관에 대한 저항적 의미 혹은 그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전술적 지향을 엿볼 수도 있다. 물론 꺼벙이가 잇따른 말썽과 실수를 통해, 다시 말해 웃음을 통해, 표면적으로 전달한 것은 정직과 근면, 작은 행복 같은 소박한 공동체적 가치였고 좀 심하게 말하면 순응과 국가의 통치이념이었다. ‘꺼벙이’는 2년 뒤 ‘소년중앙’으로 지면을 옮겨 77년까지 연재됐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만화를 익힌 길창덕의 일화 중에는 정주 조일보통학교 시절 수학여행 기행문을 극만화 형식으로 그려 제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주가 남달라 이웃 상점 벽에 걸 풍경화 그림을 그려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디지털만화 규장각’ 아카이브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를 만화로 만들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걸 만화가로서의 보람이자 소명이라 여겼고, 말년까지 그 직분에 헌신했다. 68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를 시작해 국내 연재사상 최장 기록(4,800회)을 보유한 ‘재동이’와 ‘여성중앙’에 18년 연재한 ‘순악질 여사’ 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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