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회 총회서 인상 감속 선언
발언 직후 뉴욕 증시 급반등
‘세계 경제대통령’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의장이 미국 기준금리 인상을 늦추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발언으로 투자 심리를 얼어붙게 했던 그가 완연한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적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전세계 금융시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다.
6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파월 의장은 4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AEA) 연례총회에서 완만한 물가상승률을 언급하며 “연준은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면서 인내심을 가질 것(we will be patient)”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표된 지난달 비농업 부문 신규 취업자 수(31만2,000명)가 시장 전망치를 훨씬 웃돈 것을 두고도 “고용시장이 매우 강하다는 신호이지만, 이로 인한 임금 상승이 물가 급등으로 이어질 걸로 보진 않는다”고 했다.
파월 의장은 또 “미리 정해진 정책 경로는 없다”며 “경제 상황 지원을 위해 올해 통화정책을 빠르고 유연하게 변경할 준비가 됐으며, 필요하다면 ‘상당히 많이(significantly)’ 움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준이 진행 중인 보유자산 축소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면 정책 변경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도 밝혔다. 보유자산 축소는 양적완화 시기에 사들였던 채권을 매각해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는 통화긴축 정책이다.
이런 입장은 파월 의장의 지난해 12월19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기자회견 발언과 사뭇 다르다. 당시 그는 2019년 금리 인상 횟수 전망치를 기존 3회에서 2회로 줄이면서도 “보유자산 축소 정책이 목적에 기여하고 있고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는 등 종전 매파적 입장을 견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로 인해 미국 증시는 이날부터 4거래일 동안 매일 전일 대비 2% 안팎의 급락세를 이어가기도 했다.
파월 의장의 발언을 두고 2015년 연말 이후 3년 넘게 이어지던 연준의 긴축 사이클이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연준은 2015년 12월 7년 만에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을 시작으로 2016년 1차례, 2017년 3차례, 지난해 4차례 금리를 올렸다. 시장은 특히 이날 발언이 연준 전 의장들과 미국 경제 정책 관계자, 세계 경제 석학들이 총집결하는 AEA 총회에서 나온 점을 주목하며 연준이 금리 인상 속도 완화를 사실상 공식화했다는 반응이다.
연준의 금리 인상 감속은 작년 말부터 본격 제기된 경기 둔화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감세 정책 등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경기 부양책 약발이 점점 떨어지면서 주택시장 등 실물경제 지표가 악화되고 있는 데다,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중지) 등 정치적 혼란까지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 애플 등 미국 대표 기업들의 실적 하락, 3월1일로 시한이 정해진 미중 무역협상의 불투명한 전망 또한 큰 악재다. 최근 골드만삭스는 올해 상반기 미국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4%에서 2.0%로 내리면서, 하반기엔 2% 아래로 떨어질 거란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 때문에 대다수 시장 참가자들은 미국이 기준금리를 더는 올리기 어렵다는데 베팅했고, 연준도 이러한 시장 전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미국 연방기금금리 선물시장에 반영된 연준의 연내 기준금리 동결 및 인하 가능성은 94.9%에 달한다.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이 비율이 10%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연준의 금리 인상 불가 전망이 급속도로 불어난 셈이다.
파월 의장의 ‘변심’에 세계 금융시장은 한숨 돌리게 됐다. 그의 발언이 있었던 4일 뉴욕증시 주요지수는 3~4% 급등했다. 지난 3일 최근 1년 내 최저치인 2.55%까지 떨어지며 하락세를 보였던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도 이날 상승 반전했다. 채권금리 하락은 경기 침체를 우려해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는 의미다. 피터 부크바 브리클리어드바이저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파월 의장이 보유자산 처분과 금리 인상에 유연성을 보인 점이 시장을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다만 연준의 정책 변화만으로 글로벌 경기 부진을 만회하긴 역부족이란 관측이 많다. 특히 내수 부진과 대미 무역분쟁이라는 외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 경제는 글로벌 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이다. 이번 AEA 총회 참석자들 또한 세계 최대 소비국인 중국 경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악화되는 점에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명했다.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은 “중국의 문제는 마치 ‘블랙박스’처럼 어떻게 커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서 비롯한다”며 “중국과 연계된 국가들의 경제에도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 중국팀장은 “올해 중국 금융시장은 실물경제 둔화와 부실채권 증가,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 등 부정적 요인으로 투자심리 회복을 제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중 양국이 7~8일 중국 베이징에서 차관급 무역협상을 열기로 돼 있는데 그 결과에 따라 시장이 요동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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