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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레이더’ 갈등에도… 일본 독자들 ‘김지영’으로 공감했다

입력
2019.01.07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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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셔널리즘 시대의 한류] <1>일본-문학으로 지평 넓히는 한류 

 한일 경색 와중에 日젊은이들 '82년생 김지영’ 등 한국 소설에 열광 

 BTS 티셔츠 논란 때도 공연 성황... “日에 韓콘텐츠 소개 공감 노력을”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등장 이후 지구촌에서는 내셔널리즘에 따른 국가간 반목이 심화하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과 안보와 경제를 분리시킨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압박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도 방탄소년단(BTS)이 지난해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전세계를 향한 한류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각국의 정치 환경에 응전하면서, K팝을 넘어 문학과 음악ㆍ미술 등 다방면에서 폭과 깊이를 넓혀가는 한류를 특파원들의 생생한 현장 중계로 점검해 본다.

4일 일본 최대 서점체인 기노쿠니야 도쿄 신주쿠 본점 해외문학 코너에 김지영 작가의 '82년생 김지영'과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등이 진열돼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4일 일본 최대 서점체인 기노쿠니야 도쿄 신주쿠 본점 해외문학 코너에 김지영 작가의 '82년생 김지영'과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등이 진열돼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4일 일본 최대서점 체인 기노쿠니야 도쿄 신주쿠본점에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4일 일본 최대서점 체인 기노쿠니야 도쿄 신주쿠본점에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지난 4일 일본 최대서점 체인인 기노쿠니야(紀伊國屋) 도쿄 신주쿠(新宿) 본점 2층 해외문학 코너. 매장 가운데의 ‘신간ㆍ화제의 책’을 소개하는 진열대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이 쌓여 있었다. 매장 직원에게 잘 팔리는 책이냐고 물어보니 “지난 연말 매장에서 한 차례 매진이 됐다. 새로 주문한 책들을 많이 진열해 두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지난달 14일자 1개 면에 걸쳐 조남주 작가의 인터뷰를 실었다. 번역 출간된 지 나흘 만에 일간지에 작가 인터뷰가 상세히 소개된 것은 일본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이보다 신속했다. 아마존재팬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지난달 10일 출간 직후 줄곧 아시아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체 문학 부문에서도 전자서적을 제외하면 판매순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이에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을 출간한 지쿠바쇼보(筑摩書房)는 판매 이틀 만에 증쇄를 결정해 이미 4쇄를 찍었다. 출간 보름도 되지 않아 1만부 이상 판매돼 서점가에선 찾기 어려울 정도로 품귀 현상을 빚었다. 최근 강제징용 배상판결, 레이더 갈등에 따른 경색 국면과 상반된 모습이다.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한 한국문학을 소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관하여’를 출간한 아키쇼보(亜紀書房)의 나이토 히로시(内藤寛) 편집장은 “일본문학이 최근 사소설에 편중된 반면 한국문학은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 많다”며 “게다가 일본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여서 위화감 없이 읽을 수 있다”고 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피프티 피플’은 주택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2017년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포함해 여섯 작품을 ‘한국문학의 오쿠리모노(オクリモノㆍ선물)’시리즈로 내놓은 쇼분샤(晶文社) 편집부 사이토 노리타카(斎藤典貴) 에디터는 “1970~80년대생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장르가 다양해서 등장인물이나 배경에서 한국이란 공간을 지워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는 ‘82년생 김지영’과 관련해선 “일본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춰 가정과 직장에서의 여성 문제에 공감하고 남성들은 그간 실감하지 못했던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했다.

김경주 도카이(東海)대 교양학부 교수는 “‘82년생 김지영’이 양국에서 공감을 얻는 것도 한일 모두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 역할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현실 때문”이라며 “문학이 한일 간 공통의 사회적, 시대적 고민을 교류하는 분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일본 독자의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1998년 한일 문화개방 이후 20년 간 지속돼 온 문화적 소통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2000년대 초 중년 여성들은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최근 10~20대들은 K팝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한국음식을 즐기고 한국 스타들의 화장과 패션을 따라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거나 한국문학을 찾는 일본인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기노쿠니야는 교보문고와 업무제휴를 통해 지난해 11월 신주쿠 본점 1층에 직수입한 한국서적 코너를 마련했다. 오카다 고타로(岡田航太郎) 차장은 “한국서적을 구입하는 고객이 하루 10~20명 수준”이라며 “한국 드라마와 K팝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한국서적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아시안뮤직어워드에서 일본 여성팬들이 한국 가수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CJ ENM 제공
지난달 12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아시안뮤직어워드에서 일본 여성팬들이 한국 가수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CJ ENM 제공

일각에선 최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로 냉각된 한일 외교관계가 순수문화로 지평을 넓힌 한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불거진 방탄소년단(BTS) 멤버의 ‘원폭 티셔츠’ 논란이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당시 대법원 판결과 맞물려 도쿄에서 극우세력의 혐한(嫌韓) 시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들의 항의로 BTS의 TV아사히(朝日) 음악방송 출연이 무산되면서 한일 간 역사갈등 때마다 한류가 부침을 거듭했던 전례가 되풀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BTS의 도쿄돔 콘서트는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지난달 12일 사이타마(埼玉)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아시안뮤직어워드(MAMA)에선 BTS와 트와이스 등 한류스타를 보러 온 2만4,000명의 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물론 구 시대적 한일 대결 프레임에 갇힌 기성 언론, 즉 신문과 방송은 연일 대법원 판결과 레이더 조준 공방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10~20대들은 신문, 방송에 의존하지 않고 유튜브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한류 콘텐츠를 실시간 소비하고 있다. 언어장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세계 팬들이 번역한 한류 콘텐츠를 공유하거나 번역 앱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일본 젊은이들은 한류를 손쉽게 소비한다. 기존 미디어가 소개하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직접 찾아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K팝이나 한류 드라마를 뛰어넘어 한국 고급문화를 일본에 더 알리려면 이런 방향으로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사이토 쇼분사 에디터는 “한국을 잘 모르면서 신문과 방송 뉴스만 접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불안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며 “일본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홍천 도쿄도시대학 미디어정보학부 교수는 “혐한에 대한 비판 이전에 우리 스스로 한국을 제대로 알리는 콘텐츠를 일본어로 적극 알리는 노력이 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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