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엔 개중에서도 특히 남성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특히 20대 남성에서의 민심 이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다.
대통령 지지도야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고, 여기엔 옳고 그름이 없다. 문제는 왜 떨어졌냐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젠더 갈등이다. 정부와 사회의 대처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20대 남성이 지지층에서 이탈했다는 분석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 난민 문제 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모두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의 인권 문제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갈래로 갈린다. 힐난하는 쪽이 있고 소통을 우선하는 쪽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기반엔 20대 남성의 정치 의식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그들은 보수화되어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대신 약자들이 의무 없이 권리만 주장한다는 ‘무임승차’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식자들은 이런 정서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솟는다. 우리 사회가 보수화를 논할 계제일까. 소수자를 포용해 본 적이 있긴 한가. 그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기는 할까.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몽니로 굳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정해 만들어졌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작년 소방청장은 한 언론 기자와 만나 “여성 소방공무원을 현장보다는 행정직(내근)이나 구급 분야로 배치하도록 적극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평등을 위해 여성을 우선하는 정책이 필요할 수 있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배려가 아니다. 젠더 갈등만 괜히 부추겼다.
대체복무제 마련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총은 살인 무기라는 양심을 보장하면서 총을 든 사람들의 양심도 긍정하는 건, 논리적으론 가능해도 현실적으론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식자들은 두 양심은 서로 다른 양심이라며 현자 노릇을 할 뿐이었다. 많은 사람은 병역의 부당함은 국가에 따질 문제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징병제를 괴롭지만 감수해야 할 의무라 생각하는 다수의 남성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논리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 이견을 좁혀 가는 설득의 과정은 모자랐다.
학생부 조작 사건을 본 사람들에게는 학종이 어떻게 교육 불평등을 개선하는지 설명해 봤자 의미가 없다. 꼭 게이트급 채용 비리가 아니더라도, 별 의미 없는 사업에 누군가의 지인이 꽂혀 게으르게 일하는 걸 봤던 사람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시험 같은 기계적 공정성에 매몰되어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논하기 전에 사회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뿌리부터 썩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약자들에게 칼을 돌릴 일은 아니다. 세상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은 기득권자들이었으며 더 힘들고 괴로웠던 게 그 약자들이었으니. 그러니 더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혐오 표현이 넘쳐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있다. 낙태죄 폐지 등 실질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청년층은 여전히 기성 세대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충실한 각론에 입각해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그게 우리가 추구할 방향이다.
넘실대는 혐오 표현의 심각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곡된 남성성에 대한 신화와 또래 문화가 이런 혐오 정서를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을 쌓아올린 기성 세대가 청년만 가해자로 지목하며 짐짓 착한 척 하는 것도 이상하다. 어쩌면 그들은 공고한 체계의 일원이 되어 이제 충돌할 일이 없을 뿐인 것 아닐까. 반성과 개혁이란 어려운 과업 대신 체계에 안주하며 남에게 책임만 떠넘기는 쉬운 방법을 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럴수록 연대는 더 요원해질 것이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라면, 적이 굳이 필요 없을 테니.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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