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국내 첫 회고전
흔하디 흔한 사각형의 플라스틱 의자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둥근 형태의 단순한 접시들도 가장 큰 접시 안에 작은 원을 그리며 놓여 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디자인 전시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모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작품은 평범해 보이지만 세계적인 작가가 만들었다. 비트라, 무인양품, 삼성전자, 알레시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협업해온 영국의 스타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60)의 국내 첫 회고전이 서울 회현동 복합문화공간인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다.
포개진 의자들은 외양은 평범해도 속은 범상치 않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 의자의 속은 텅 비었다. 가스 주입 기술을 적용해 재료를 덜 사용하고 무게를 줄였다. 가벼워서 옮기기 쉽고 겉면이 매끈해 여러 개를 쌓을 수 있다. 사무공간, 상업공간, 문화공간 등 어느 공간과도 잘 어울리고 쓰임새에 실내, 실외 구분도 없다. 우천 시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의자 좌석에 작은 구멍을 냈다. 이 실용적인 기능들은 모리슨이 치밀한 탐구 끝에 내놓은 평범한 디자인을 입고 있을 뿐이다. 모리슨은 사용하기 편리하고, 만들기 쉽고, 오래 써도 질리지 않은 디자인이야말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봤다. 그의 이 같은 디자인 철학은 ‘슈퍼 노멀(Super normal)’이라 부른다. 그는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온 디자인은 쉽게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초기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의 의자’부터 최근 출시된 만년필과 안경에 이르기까지 그가 30여년간 작업해온 제품 100여가지를 한번에 만날 수 있다. 의자와 전등, 주전자, 라디오, 전화기 등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일상의 사물이 가진 평범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전시를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달덩이 같은 형태의 유리 전등 글로볼이나 와인 병 코르크를 분쇄해 블록으로 압축한 코르크 시리즈, 두 개의 접시가 아래 위로 달려 분수처럼 보이는 로터리 트레이 등은 단순한 디자인을 통해 실용성을 극대화한 작품들이다. 개성 넘치는 디자인은 없지만 군더더기를 모두 빼낸 간결한 디자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제품 디자인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영감을 주고 받아온 그의 삶의 면면도 만날 수 있다. 1층에서는 1988년 첫 강연에서 아무 말 없이 오직 그가 영감 받았던 사진과 제품의 슬라이드 쇼만 보여줬던 그의 ‘이미지 강연’이 상영된다. 3층에서는 간단한 방법으로 영리하게 문제를 해결한 이미지들을 카메라로 찍고,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적은 포토 에세이가 전시된다. 그는 길가에서 마주친 통나무 틈을 활용해 만든 화분, 여러 종류의 고리가 가지런히 진열된 상점의 풍경 등에서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실용주의적 사고를 토대로 멋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대로 디자이너가 이런 사고가 없다면 애초에 디자인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일침을 가한다. 전시는 3월24일까지.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