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천황이 2차대전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황세자 아키히토(明仁)는 만 11세였다. 전장의 폐허를 보며 그 무렵 평화의 중함을 깨달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가 당시 일본 상류층에게 더 호소력이 컸을 극우적 정서, 예컨대 실력을 배양해 치욕을 씻자는 식의 논리에 물들지 않고 평화주의를 평생 고수한 것은, ‘평화헌법’의 현실에 순응한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헌법에 따라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는 그가 아닌 내각이 정한 거였지만, 재위 중 그는 평화 번영의 저 연호의 의미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식하고 또 실천했다.
현행 일본 헌법 즉 평화헌법에 따르면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상징”이다. 그는 총리 임명권과 법률ㆍ조약의 공포권, 국회 소집 등 국사에 대한 명목적 의례적 권한을 지닌다. 내각과 의회가 정한 바에 따라 서명하고 직인 찍고 의례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게 그의 역할이다. 황실 제사 등 황가의 전통과 관습에 따른 대소사도 수행해야 한다. 그런 일들이 연중 1,500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탐탁찮아도 서명하고, 동의하지 않아도 공포하고, 서기 싫은 자리에 선 일도 허다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저 헌법 1조가 정한 바의 ‘상징’에 더해 스스로 평화의 상징이고자 했다.
중국 등 2차대전 피해국을 방문할 때면 그는 그 어떤 일본 정치인보다 더 진솔하게 과거의 그릇됨을 인정하고 사죄했고, 기념일 기자회견이나 이런저런 행사의 기념사를 하는 자리에 설 때마다 기억과 반성을 주문하고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자고 촉구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 해 8월 기자회견을 통해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다. 건강이 주된 이유였지만, 아베 정권의 개헌 및 천황의 ‘일본국 원수’ 구절 삽입 안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분석한 예가 적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천황’이 선 6세기 아스카 시대 이래, 헤이안시대의 귀족정치와 막부시대의 무인정치, 심지어 천황 중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는 메이지 이후 히로히토의 시대까지 군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된 역사를 환기했을지 모른다.
1989년 1월 7일 즉위한 그가 오는 4월 30일 퇴위한다. 헤이세이 시대도 막을 내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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