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둔화와 불평등, 전 세계 민주주의 후퇴 
 文정부 능력ㆍ소통 부족, 촛불민주주의 지체 
 진보ㆍ보수 함께 경제, 사회갈등 돌파구 열길 

1980년대 후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냉전 종식 후 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칠 때만 해도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고, 시민 자유와 인권은 보편적 추세였다. 전 세계 시민 대다수는 민주주의 체제에 무한한 신뢰와 자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급변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민주주의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경제 발전의 급격한 둔화와 불평등 심화, 세계화 후유증에 따른 현상이다. 불안과 분노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공통된 정서가 됐다. 그 틈을 비집고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세를 키우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만큼 민주주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다. 헌법 기관과 규범 무시, 소수자 탄압과 언론자유 침해 등은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의 퇴조를 상징한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은 트럼프”라고 했지만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큰 위협은 트럼프”란 표현이 더 적확하다.

미국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은 민주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 정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불과 10여 년 사이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수아 올랑드, 에마뉘엘 마크롱 등 네 번의 보수ㆍ진보 정권이 번갈아 집권했지만 정치 불신, 민주주의 위기를 막는데 실패했다. 극우 포퓰리즘의 발흥은 미국,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성장 정체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양극화와 불평등은 끝없이 확대되고 있는데 어느 나라, 어떤 진영도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 상황이 기성 정치권과 체제 불만으로 나타나고 한편으로는 이민자와 소수인종 배척으로 표출된다. 여기에 소셜미디어가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온상이 돼 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서 민주주의 위기가 커지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박근혜 정부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민생과 경제는 가라앉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정책 실행 능력과 소통부족은 우려를 자아내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격렬해지는 모습이다. 당장 성과는 없더라도 지금의 방향이 옳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혁의 동력을 급속히 소진시키고 민주주의 진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무엇보다 안타깝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이를 보수ㆍ진보 프레임으로 가두려는 무모함과 무책임이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가 ‘축적의 길’에서 진단했듯이 현재 한국이 부닥친 경제ㆍ산업적 침체는 특정 정권, 특정 정책에 기인한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일상화된 극단적 정치 대립과 기업들의 혁신 부재와 현실 안주, 경제 주체들의 이기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결과다. 이런 구조적 요인에 이념갈등, 남녀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등 초고속성장에 가려진 모든 갈등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폭발 직전에 놓여있다. 민주주의 붕괴를 촉발할 요소가 차곡차곡 쌓이는 형국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권력 다툼에 매몰된 정치집단의 정략적 행태는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 난국을 타개할 비전과 해법은 없고 오로지 상대진영을 거꾸러뜨릴 생각뿐이다. 반문재인은 현 정권을 공격하기에는 좋은 수단이지만 우리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타개하기는 어렵다.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정치세력은 물론 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지난한 것들이다.

2019년은 단순히 문재인 정부의 성패를 가르는 해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후퇴할지를 가늠하는 해가 될 것이다. 애써 얻은 민주주의를 잃어버리고 혼란과 정체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의 기로에 서있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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