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EBS가 한국 전문의 800여명에게 ‘이 시대의 명의(名醫)’를 물은 결과 1위가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였다. 외과의인 그는 해방 전인 1943년 처음으로 간암 환자의 암 절제수술을 했고, 59년 대량 절제수술에도 성공했다. 당시 의료 현실과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던 간 외과술을 감안하면 저 수술은 시도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 게 아니다’는 소신에 따라 평생 국가 주관 외과 전문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아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로 지냈다. 월남 후 부산 서구 암남동에서 운영한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전신) 시절 그의 환자들이 원한 것도 온몸의 병을 두루 봐줄 의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그 병원을 1951년부터 76년까지 25년간 운영했다.
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병원비를 못 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가불받아 대신 내주기도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몰래 환자의 도피를 돕기도 했다고 한다. 영양실조로 병원을 찾은 이에게 ‘밥값’을 처방하고, 길에서 만난 걸인에게 자신의 월급 수표를 통째 건네 경찰인지 은행인지로부터 확인 전화를 받은 일화도 전해진다. 1968년 한국 최초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만든 것도 그였다. 가난한 환자들을 혼자 다 도울 수 없어 만든 그 조합은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의 모델이 됐고, 제도 시행과 동시에 해산됐다. 봉사를 전제한 조합 운영 원칙에 따라 의사 인건비를 거의 산정하지 않는 바람에 현 의료보험의 저수가, 특히 의사 인건비 수가가 장비 수가에 비해 낮은 원인이 됐다고 한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성의전을 거쳐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전 시절 그의 스승이 백병원 창립자 백인제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평양의대와 김일성종합대학 외과교수를 지내다 51년 한국전쟁 중 차남만 데리고 월남했다. 그는 이후 독신으로 살았고, 평생 자신의 집조차 가지지 않았다. 기독교인이었으나 함석헌 등의 ‘무교회주의’에 적극 동조했고, ‘종들의 모임’이라는 초교파 신앙단체에서 활동했다. 1995년 오늘 그가 별세했다. 향년 84세.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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