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억은 조금만 따뜻해도 다른 계절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둘둘 목도리를 두른 목덜미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스미어 움츠러들다가도 길거리 음식인 계란빵 하나, 어묵 국물 한 모금으로 온 몸과 마음이 환해지듯. 반면 겨울의 마음은 조금만 시려도 차디찬 얼음 칼날로 에이는 듯하다. 차디찬 손에 얼음장이 닿으면 전기가 오르는 것 마냥 손바닥이 쩍, 하고 갈라지는 느낌처럼. 따뜻함과 시림의 간극이 커지는 겨울은 때론 충만하고, 때론 위험한 계절이다.
그런 겨울에 죽음의 소식 둘이 전해졌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야간작업을 하다 숨진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와 강릉의 한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고3 학생들이다. 세밑에 전해진 두 죽음은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긴다. 모든 죽음은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동등한 무게를 지니지만 특히 어리고 젊은 이들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두 죽음은 그저 사고사로 이름 붙이기에는 하청, 비정규직, 안전 관리 등 원인이 우선되어 있으니 깊은 숨을 내뱉게 된다.
고 김용균씨의 죽음 앞에서 문득 아주대 권역외상센터장 이국종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장 강조했던 바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의 기반을 만드는 분들이 중증외상을 당할 위험이 크다. 중증외상센터는 ‘사회 안전망’이다.” “중증외상센터 환자 대부분은 블루칼라 노동자, 즉 사회 취약계층이기 때문에 관련 체계 개선에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김씨가 개인 휴대폰에 남긴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반 일부는 고되고 험한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덕분에 지탱되고 있다는 점을 무겁게 깨닫는다. 노동의 대가를 누리는 사회로서는 그들의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안전장치를 확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자본의 논리로, 기본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노동자의 존재와 권리는 점점 삭제되고 있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했던 노동자는 좁은 갱도를 작은 몸집으로 오갈 수 있는 ‘어린이’였다. 힘없는 존재일수록 육체적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 환경의 참담함과 씁쓸함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조그만 주먹”을 척, 들어 올리면 모두 조그만 주먹을 예의주시하면서, 주먹이 조그마할수록 더 조마조마 조심하면서, 멀리서부터 브레이크를 밟는 마음이 자본에, 노동에, 우리 마음에 내릴 날은 언제일까. 석탄 검댕이 묻은 까만 주먹을 높이 쳐들고 두 눈에 힘주고 차디찬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마음들에, 멀리서 조용히 마음 하나만 더해본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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