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엽 할머니 8년간 150여점 그려
그림 배운 적 없지만 소박함이 매력
“그림에 열중할 땐 끼니도 잊어”
서양화가 이현영씨가 막내아들
여기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활발하게 소통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9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열정을 존중하며 응원하는 화가. 이들의 아름다운 동행은 가족 간 대화와 소통의 부재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 김두엽(91) 할머니와 막내아들 이현영(50)씨 모자는 화가다. 김 할머니는 노령인 83세에 혼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림은 더더욱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가득하다. 김 할머니는 “만사 다 잊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할 땐 끼니를 잊고 지나칠 적도 있었다”며 “스케치북을 펼치고 붓을 잡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활짝 웃었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할머니의 하루 주된 일과가 됐다. 김 할머니는 “마루에 홀로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잠자리에 들어서도 무엇을 그릴지 생각하면 즐겁다”고 말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지만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화가 아들의 재능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만큼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할머니의 그림은 소박하고 순수한 매력이 묻어난다. 매화, 장미, 해바라기 등 꽃과 나무, 마을 모습, 해수욕장 등 동화 같은 풍경이 할머니의 그림 소재다. 처음 그림을 그릴 땐 사진이나 달력을 보고 그렸지만 지금은 과거 일상 속 기억과 상상하는 것들을 그린다.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하고 있을 것 같은 낯익은 모습들이다. 요즘 그림 속엔 아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8년 전이다. 전남 보성에서 홀로 지내던 어느 날 TV 드라마에서 그림 그리는 할머니 모습을 본 뒤 달력 뒷장에 연필로 긁적거린 사과 그림이 계기가 됐다. 막내아들은 어머니 그림을 보고 “참 잘 그리시네요”라고 칭찬했다. 화가 아들의 칭찬을 들은 할머니는 달력 낱장을 뜯어 실로 꿰매 만든 스케치북에 본격적인 그림 작업을 시작했는데, 색을 입히는 게 남달랐단다. 이렇게 시작한 그림은 지금까지 150점이 넘는다.
김 할머니가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데는 단 둘이 살아가고 있는 8남매 중 막내아들인 이 작가의 도움이 컸다. 이 작가는 추계예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 홍대 앞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고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한 중견작가다. 그는 점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작품 소재도 어머니와 같은 일상의 풍경이다. 그는 끊임없이 생과 사에 대한 질문을 던져 그림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반복적으로 찍어낸 수많은 점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두 사람은 마음으로 그려낸 소박한 풍경과 잔잔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회화 작품을 모아 2년 전부터 모자전을 열고 있다. 앞선 두 전시회는 2016년 고향 광양에서 열었으며 세 번째는 고흥 남포미술관에서 ‘휴식’을 주제로 가족 사랑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작품 80여점을 선보였다. 지난달 1일부터 순천 도솔갤러리에서 ‘91세 어머니와 아들의 네 번째 나들이전’을 열고 있다.
이현영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8년이 흘렀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근심걱정이 사라진다’는 어머니의 열정이 제 자신에게도 큰 자극이 되고 있다”며 “어머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꾸준히 그림 작업과 전시회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31일까지.
광양=글ㆍ사진 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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