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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가 산재 입증해야 하는 제도부터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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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가 산재 입증해야 하는 제도부터 바꿔야”

입력
2018.12.18 04:40
수정
2018.12.19 10:3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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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란 반올림 상임활동가

삼성전자-반올림 합의 이끌어

이종란 노무사는 근로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사람 생명을 우선하는 기업문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이종란 노무사는 근로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사람 생명을 우선하는 기업문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지난 달 23일 ‘삼성전자 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으로 11년간 끌어온 삼성과 반도체 생산 근로 피해자 모임 ‘반올림’의 분쟁이 최종 타결됐다. △1984년 이후 반도체, 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 사내 협력업체 전현직 직원 전원을 대상으로 △백혈병 등 40여 종의 질환과 유산에 대해 최대 1억5,000만 원을 보상한다. △산재 예방사업에 발전기금 500억원도 기탁한다. 협약식에 참석한 김기남 삼성전자 사장은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했다 질병을 얻은 피해자와 가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발표 즉시 ‘우리 사회의 귀중한 사회적 합의 모델’(정의당 심상정 의원)로 평가 받았지만, 반올림 상근활동가인 이종란(42) 노무사는 이날의 협약을 두고 “단체 이름처럼 이제 겨우 ‘반올림’ 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최근 서울 동작구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산적한 문제 중 하나가 해결됐다. 앞으로 더 많은 진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종란 노무사가 이제까지 한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한 이유는 국내 산재보험의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이 노무사는 “피해자가 산재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산재보험 제도의 대전제를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역학조사가 여전히 의학적 인과관계에 치중돼있어 질병의 경우 불승인율이 높다. 행정 소송을 거칠 때는 근로자가 산재 피해의 인과관계를 밝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질병은 근골격계 질환에 비해 산재 인정율을 현격히 낮다.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부터 올해 4월까지 국내 반도체, LDC 산업 종사자 중 산재를 신청한 근로자 90명 중 25명만이 산재를 인정받았는데, 그나마 절반 이상인 13명은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해 행정소송을 통해 구제 받았다. 이 노무사는 “기업은 화학물질 등 (산재 입증에 필요한) 정보를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첨단 분야라 관련 물질도 생소하고,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데 그나마 이에 따른 질병도 피해 입증에 오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산재 피해 입증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부담하는 현행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작업장 내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정도를 기재한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각종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 노무사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건 노동자 건강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근로자의 산재를 성실히 신청하는 회사가 산재 보험료를 더 내는 지금의 산재보험 구조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이 노무사는 “우리나라 산재보험은 순수 사회보험과 손실보장성 보험이 혼합된 형태다. 산재가 적을수록 보험료를 적게 내는 방식이라 사업주가 산재를 은폐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산재를 공상처리(산재를 신청하지 않고 재해 근로자와 사업주가 민사합의로 해결)하면 피해자는 국민 세금인 건강보험으로 치료받고, 기업은 산재 보험료를 할인받는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삼성 현대차 LG SK 등 30대 대기업이 산재 신청을 적게 해 감면받은 보험료는 2017년에만 5,003억3,900만원에 달했다.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이런 이유로 실제 경미한 사고의 경우 공상처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부에서는 제대로 된 집계조차 하지 못한 실정이다. 신상도 서울대 응급의학과 교수 연구팀의 ‘응급실 기반 직업성 손상 원인조사 연구’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년간 일하다 다쳐 응급실을 찾은 환자 중 산재보험 요건을 만족하는 환자 3,859명 중 실제로 산재보험을 받은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민주노총에서 법률지원을 하고 있던 이 노무사가 반올림 상근활동가가 된 건 2007년 7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딸 유미씨를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잃은 황상기(63)씨를 만나면서다. “2인 1조로 일한 두 명 모두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너무 석연치 않았지만 (산재) 증거가 없고 아무도 이 문제를 손대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도 용기를 가진 건 이런 행동이 노동자 건강권, 작업환경 개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 갈 거라는 주변의 조언 때문이었어요.” 이 노무사와 황상기씨, 또 다른 질병 피해자 한혜경씨, 한씨의 어머니 김시녀씨 등은 첨단산업에서 일어난 직업병 문제를 제기하며 반도체, LCD 생산 공정에서 노동자 건강권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됐다.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이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일부 화학물질은 안전한 다른 물질로 대체됐죠. 예전보다 보호기구 사용도 늘었고요. 하지만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하청업체로 위험 업무가 급속히 외주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선과제는 여전히 많습니다.”

협약식에서 담담했던 황상기 씨는 끝내 눈물을 보여 주변을 숙연케 했다. 뒤풀이 하셨냐는 질문에 이 노무사는 “(협약식 당일에) 하루 종일 인터뷰하느라 밤 10시에야 저녁 먹고 강남버스터미널에서 헤어졌다”고 답했다. “그때 (황유미씨)어머니께서 ‘남편이 독하게 한다고 계모임 끊고 친구도 안 만나고 10년을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반올림 발족한 게 2007년 11월 20일인데 그때부터 일주일에 적게는 한번, 많게는 세 번을 속초에서 서울까지 오가셨거든요. 만 11년만에 협약이 나온 거니까 (딸 유미씨가 치료 받다 숨진) 그 길을 1,000번 오간 거죠. 그런 숭고한 노력이 이번에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해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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