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송파구 김정규당구스쿨 아카데미. 한 여성이 당구 대대 앞에서 큐(cue)에 초크를 묻히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흰색 공을 때렸다. 흰색 공은 곧바로 빨강색 공을 맞힌 후 당구대를 세 번 맞더니 반대편에 있던 노란색 공을 맞혔다. 이 여성은 두 차례 더 같은 방식으로 공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상대편이던 남성이 “정말 잘 친다”며 박수를 쳤다.
내리 세 번을 맞히며 박수를 받은 이는 고교시절 포겟볼 당구선수로 활약했던 이보라(36)씨다. 이씨는 고등학교 때 포켓볼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당구실력보다 자신의 당구치는 모습에 더 관심 있어 하는 시선에 회의를 느껴 당구를 그만뒀다.
그는 “당시 소속사에서 비키니를 입고 화보를 찍어야 하고,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이나 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입고 당구를 치도록 했다”며 “그들은 내 당구실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나를 상품으로 봤다”고 회상했다.
-당시에 당구 문화는 어땠나.
“그때 당구는 스포츠가 아닌 오락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나를 선수가 아닌 여성으로 봤고, 소속사도 당시 여성 당구인을 그냥 상품으로 봤다. 20살 여성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당구를 그만뒀다.”
-최근 당구장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맞다. 일반 당구장은 아직 덜 변했지만 많이 변했다. 특히 당구아카데미 같은 곳이 생기면서 당구를 전문 스포츠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특히 케이블TV 등에서 당구대회를 방송해 준 것의 영향도 큰 것 같다. 물론 당장구내 금연도 한 몫 했다.”
-말한대로 당구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고 들었다. 당구는 자신만의 점수(핸디)가 있어 프로나 아마추어 상관없이 평등한 조건에서 나와의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종목이다. 남성이라고 잘치고 여성이라고 못치는게 아니다. 남녀노소 모두 어울릴 수 있는 게임이다.”
-앞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은 없나
“국민 대부분 축구, 야구 등 프로선수 이름은 한 두명 정도는 안다. 하지만 당구 선수는 거의 모르신다. 남자는 당구를 잘 쳐야 이슈가 되지만 여자는 일단 예뻐야 인기를 끈다. 이러한 인식이 빨리 바뀌었으면 한다.”
27살 되던 해에 다시금 당구계에 발을 들인 이씨는 현재 3곳의 당구동호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5년 전부터는 각종 대회에 나갈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이씨는 “대대 20점 정도 된다. 4구로 치면 300정도. 당구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와 함께 당구스쿨 회원인 신철수(71)씨도 하루 평균 2시간 정도 연습을 한다고 한다.
대기업 출신은 그는 50대 중반에 당구 큐를 본격적으로 잡았다고 했다. 지난해부터는 이곳 당구스쿨 회원에 등록했다.
그가 회원에 등록하게 된 계기는 정신건강 때문이다. 그는 “공 하나로 두 개를 맞추는 방법은 무한하다”며 “한 번에 맞출지, 원 쿠션 또는 투 쿠션으로 맞출지 등 계속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구 예찬론을 펴는 이유가 있다면
“앞서 말 한 것처럼 공을 칠 때 우측, 좌측, 한 번에 맞출지 말지 등 집중해서 공을 쳐야 한다. 내가 원하던대로 안가면 실패한 이유를 찾게 된다.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별도의 치매예방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데 힘들지 않나.
“골프는 4시간 이상 걸어다닌다. 산행 한번 하더라도 2~3시간 걷는다. 당구는 1~2시간 실내에서 운동삼아 움직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날씨에 영향 받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어 좋다”
-당구를 치는 분들이 주변에 있나
“당구를 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 모임에서도 당구장에 곧잘 간다. 당구 차를 마시다가도 마음만 맞으면 그냥 가서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취미생활도 많지만 당구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당구를 권장하고 싶나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가장 완벽한 취미다. 주변에 권장하고 있다. 학창시절 한번쯤 가봤던 실력이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지금 당장 한 번 가보시길 권한다.”
당구스쿨 회원 중에는 초등학교 선수도 있다. 현재 국가대표 선수인 형이 치는 모습을 보고 무작정 따라한 성일초교 2학년 정민기(9)군이다. 현지원(46) 당구 국가대표 감독의 지도를 받고 있다.
포켓볼에 입문한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대상 3개 대회를 석권한 신동이다. 정 군은 “그냥 형이 치는 거 보고 나도 해보고 싶어 했는데 너무 재미있다”며 “형보다 더 잘치고, 형처럼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현 감독은 “민기는 공이 잘 들어가게 하는 것 보다 공을 잘 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라며 “처음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는데 대회를 열어줬더니 굉장히 열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회 등을 통해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당구라는 스포츠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했다. 산만한 아이들이 당구를 통해 집중력을 키울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휴대폰만 만지던 아이들이 바뀌었다고도 했다.
현 감독은 마지막으로 “당구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빨리 확대됐으면 좋겠다”며 “이곳 당구스쿨에는 민기부터 이보라씨, 신철수 어르신까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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