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조직, 깃발, 방향 없는 노란조끼들
공통점은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
한계봉착 신자유주의 이후 대안 논의를
파리 한복판이 노란 물결로 넘실거린다. 연일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노란 조끼 시위의 폭력성이 보도됐다. 물론 노란 조끼 시위대는 치안공백을 노려 상점을 공격하는 검은 약탈자 무리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개선문을 점거하고 샹젤리제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고급 스포츠카를 뒤집어 태우고 파리 중심가 은행 현관들을 뜯어냈다. 이러한 과격 시위는 프랑스에서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10년 전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이 다방면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했을 때도 노동자와 시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2018년 겨울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는 그 실체를 쉽게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 사례와 다르다. 주도하는 중심이 없고 소셜미디어가 중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촛불시위, 미국의 월가 점거시위와 유사하다. 그런데 노란 조끼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공통된 요구사항조차 없다. 유류세 인상 반대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 최고임금 제한, 최저연금 보장, 장애인수당 인상, 대통령 7년 임기제 복귀, 난민 신청자 환대 등 40가지가 넘는 요구가 등장했다. 지역마다 시위 방식도 다양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누구와 대화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노란 조끼가 단지 카오스만을 원한다고 불평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였다. 공통 요구사항은 대통령의 퇴진이었다. 마크롱은 현실과 유리되어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킨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됐다. 프랑스 대중은 그가 빈곤을 모르는 부자 대통령이라 비판했다. 지난 대선에서 마크롱의 공약은 역대 정권이 모두 실패했던 진정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장 선명하게 추진했던 사르코지 역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특히 산업분야에서 보호주의를 고수했다. 마크롱은 어정쩡한 신자유주의를 추진해 왔던 두 양대 정당, 사회당과 공화당을 모두 심판하고 지고지순의 자유주의를 프랑스에 도입하겠다는 이상을 밝혔다. 그리고 대통령이 조직한 ‘정당 아닌 운동’이 의회를 장악했다. 그 운동의 주축 세력은 대체로 전문직 혹은 기업인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제5공화국 이래 최대 의석을 확보한 마크롱은 결연했다. 각종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들처럼 자유주의 개혁에서 물러나거나 타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크롱 신화는 이미 무너졌다. 예상 재정지출을 제대로 계산했는지 알 수 없는,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타협안을 발표했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우리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모두가 안다. 국가와 기업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출을 줄였다. 대량해고와 조기퇴직이 확산됐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경쟁 속에서 가난해져야 했다.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에서 보았던 이러한 삶의 모습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치는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복지를 줄이는 정치가 피 말리는 경쟁에서 낙오하는 대중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란 조끼가 프랑스 전역으로, 나아가 벨기에, 네덜란드, 튀니지 등 주변국가로 확산되는 이유일 것이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그리고 트럼프 집권 이후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대안 없음’을 강조했던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면 어떤 다른 대안이 가능할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무정형의 노란 흐름이 다른 사회에 대한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한 명의 지도자만 잘 뽑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이념도 조직도 깃발도 방향도 없는 노란 조끼 물결이 한국 사회에 다시 던지는 질문이다. 마크롱의 담화가 효과 있을지 우리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
오창룡 UC버클리대 방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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