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개봉한 멕시코 영화 ‘로마’는 많은 영화마니아들이 고대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날 전국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스크린 수는 27개. 전국 스크린 중 1% 남짓에 불과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웬만하면 자리잡고 있는 멀티플렉스 체인에서는 관람할 수 없다.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인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지난해 화제의 영화 ‘옥자’에 이어 ‘로마’의 상영을 거부해서다. ‘로마’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볼 수 있는 영화다.
▦ ‘옥자’와 ‘로마’의 제작사는 미국의 넷플릭스. 전 세계 1억3,000만명 가량의 유료 회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OTT)다. 넷플릭스는 자체 제작 영화의 온ㆍ오프라인 동시 공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극장 잠재 관객을 온라인으로 끌어들이려는 넷플릭스의 영업 방식을 극장업주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극장 개봉(1차 시장)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 VOD와 DVD 등(2차 시장)으로 공개되는 기존 시장 질서를 무너뜨린다며 미국과 유럽 극장업주들은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미국에서 개봉할 때 ‘로마’의 상영관 수는 고작 3곳이었다.
▦ 한국 영화 시장은 사정이 좀 다르다. 미국 유럽과 달리 한국은 영화의 1차 시장과 2차 시장이 명확히 구분돼 있지 않다. 극장 개봉과 동시에 ‘특별 서비스’ 형식으로 IPTV에 바로 영화가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넷플릭스의 온ㆍ오프라인 동시 공개가 한국 영화 시장과 더 잘 어울리는 셈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체인 3사는 미국 유럽 극장업주들과 마찬가지로 “생태계 파괴”를 내세우고 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옛 플랫폼인 극장이 신규 플랫폼의 시장 진입을 봉쇄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 세계 최고 영화제로 꼽히는 칸국제영화제는 프랑스 극장업주들의 반발에 부딪혀 올해부터 극장에서 먼저 소개되지 않는 영화는 축제에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베니스영화제는 올해 넷플릭스 영화를 적극 끌어안았고, 오랜 만에 초청작 수준이 칸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는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이 상을 받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국내 404개 스크린에서 개봉했다. 업체간 힘겨루기에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인 관객이다. 좋은 영화를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멀티플렉스 본연의 목적 아닌가. ‘로마’는 내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라제기 문화부장
※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