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내외법’ 이면에 숨겨진 19세기 조선 여성의 삶
“이건 내 돈, 저건 남편 돈.”
아무래도 요즘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아내와 남편의 재산 구분이 존재했다.
김현숙 건양대 교수가 쓴 ‘조선의 여성, 가계부를 쓰다’ (경인문화사, 2018)에 따르면 충남 홍성면 갈산에 살았던 유씨부인의 일기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논밭을 남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는가 하면 일기에 남편(김호근)이 자기 돈으로 일꾼을 사서 김매기를 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부부별산제와 여성의 재산 처분권은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시절 여성의 의무는 부지런함, 길쌈, 바느질, 봉제사, 접빈객, 공경, 화목이라고 알고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널리 통용되었던 ‘내외법’에는 “남자는 집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여자는 ‘집안의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집안의 일’이란 게 우리의 생각보다 규모와 폭이 넓다. 유씨부인은 일기를 기록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133명의 손님을 접대했고 30여 차례의 제사 준비와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선물을 주고받았다. 이와 함께 논밭을 관리는 물론이고 김장과 된장 담그기 등 근대 이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절기 행사를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가사에 필요한 재화의 처분과 노비 인사, 노동력 배분, 가사 운영 등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집안 권력을 틀어쥐었던 것이다.
당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렇다면 대규모 농가를 하나의 기업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우선 유씨부인이 CEO로 앉아 있던 김씨 집안에는 ‘부하직원’만 43명이었다. 기업 규모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이 집안이 소유한 전답이 5만6,480평이었고, 후손이 “대원군까지는 잘 살았다”고 증언한 점을 감안하면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알아주는 부농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노비들은 주인집을 중심으로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 유씨부인은 정미 작업이나 메주 만드는 일을 열세 집에 골고루 배분했다. 노비들은 각자 집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작업한 후 결과물을 주인집으로 가져왔다. 부서별로 업무를 수행해 성과를 보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일에 따라서는 주인집에 모여서 다함께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여성 CEO는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의 직무도 구분했다. 남자직원(奴)들은 농사일보다는 물품구매, 장거리 선물, 편지교환, 가내 사환, 교군 업무를 도맡았다. 이들은 대규모 농경 작업 때문에 외부에서 인력을 사오면 감독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자 직원들은 식사, 빨래, 청소를 비롯해 집안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했다. 근거리에 편지를 전하거나 세찬을 배달하는 일도 여자직원들의 몫이었다.
장사도 했다. 책이 제시한 다른 집안의 예에 따르면, 19세기의 선비였던 이항로의 둘째 딸은 술을 빚어서 생계비를 벌려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그만두었지만 말리지 않았다면 선비의 딸이 술장사를 했을 것이다. 어느 집이든 가내 인력(노비)를 활용해 술과 국수, 두부, 장 등을 판매하거나 돈이나 대가를 받고 주문 생산을 하기도 했다. 때로 사원을 서울에 파견해서 구매해 온 물건을 돈을 얹어 소매하기도 했다.
길쌈은 안방마님이 진두지휘하는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면포를 만들어 옷을 해 입는 것은 물론이고 조세를 납부할 때도 요긴하게 썼고, 시장에서 화폐로 유통하거나 돈으로 바꾸기도 했다.
안방마님의 현금보유고는 매우 중요했다. 은행이 없던 시절, 안방마님들은 대부업을 했다. 유씨부인의 경우 노비들에게는 한 번 빌려주면 2냥에서 5냥 정도의 소액이었고, 친족이나 평민들에게는 10냥에서 50냥씩 빌려주었다. 이자를 받기는 했지만 돈을 빌릴 데가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러웠을 것이다. 신용을 바탕으로 돈을 빌리고 갚으면서 끈끈한 연대를 강화해 간 셈이었다.
인맥관리도 요즘 못잖다. 남자들이 몰려있는 곳에 거리낌 없이 끼어들었던 건 아니지만 유씨부인은 남자를 상대할 일이 많았다. 그는 1년 반 동안 253명을 만났는데 그중 52%가 남성이었다. 여자보다 남자를 더 많이 상대한 것이었다.
인맥이 분포한 지역도 넓었다. 외거노비들도 있었지만 친인척 중에 멀리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친인척의 비율이 46%였다. 그들은 김호근가가 위치했던 충청도를 비롯해 경기, 서울, 해주, 황주, 임실 등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인맥이 전국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끈끈했다. 해외까지 인맥이 뻗어있는 요즘과 비교하면 ‘그다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 폭이 넓었다. 여성 CEO의 활동 구역은 이토록 넓었다.
기록으로 남은 여성의 모습은 ‘남존여비’, ‘칠거지악’, ‘삼종지도’로 표현되는 피해자로서의 여성, 상속은 꿈도 못 꾸는 경제력 없는 무능한 여성상을 허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우리가 깜빡 잊은 게 아니라면 타자(일제)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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