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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료를 보니… “위안소 설치ㆍ운영에 일본군이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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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료를 보니… “위안소 설치ㆍ운영에 일본군이 개입”

입력
2018.12.13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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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中이 유네스코 등재 추진했던 자료 분석 

중국 상하이 일본 주둔군의 위안소. 김정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상하이 당안관 자료 분석을 통해 일제가 위안소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국 상하이 일본 주둔군의 위안소. 김정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상하이 당안관 자료 분석을 통해 일제가 위안소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 일본 특무기관 이케다 반장이 상하이경찰서에 명령해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위안소를 열도록 했다. 위안부 1명당 보조금까지 지급하겠다 했으나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다. 상하이시정부는 경찰이 위안소에 개입하는 건 안 좋은 일이니 신중하게 처리하라 지시했다. 1939년 12월 26일에 작성된 보고서다. 일제가 중국 경찰에게 위안소를 만들라고 지시한 증거다.

#2. 상하이 시민 양수장이 일본 헌병대와 육군경비대의 허가를 얻어 위안소를 열었다. 7명의 위안부가 있는 이 위안소는 일본 육군과 해군 전용 시설이었다. 상하이시 경찰국장은 특별 순찰을 통해 이 위안소를 잘 보호하라 명령했다. 1939년 2월 25일 상하이시 경찰국이 작성한 보고서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에 직접 관여한 증거다.

#3. 난징시민 황위봉은 일제 때 위안소를 운영하는 일본인에게 자신의 건물을 7년간 강제로 빌려줘야 했다. 일본인은 자기 건물뿐 아니라 이웃집까지 위안소로 썼다. 패망 직전 그간의 임대료라며 준 돈은 한 달치 임대료 수준에 불과했다. 1945년 11월 문건이다. 위안소는 현지 중국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14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역사정의의 과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김정현 재단 연구위원의 ‘중국 남경ㆍ상해의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설명하고 있는 위안소 실태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으로부터 넘겨 받은 상하이 당안관(1938년 12월~1941년 11월), 난징 당안관(1938년 1월~1947년) 자료를 분석했다. 당안관은 우리의 자료보관소다. 당안관에 보관된 자료이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이 이 내용 가운데 일부를 논문으로 다룬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재단은 이 두 당안관 자료 분석이 마무리 되는대로 자료집 형태로 정식 출간할 예정이다.

이 자료 대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연구위원은 “일제가 1937년 난징을 점령한 직후에는 일본인 위안부를 잠깐 불러오기도 했으나, 그 이후 거의 대부분을 조선인 위안부로 채워 넣었다”면서 “중국측 자료라 실명이나 직책 등으로 등장하는 구체적 인물들은 대부분 중국인, 일본인이지만 그 대상이 되는 위안부들은 거의 다 조선인이라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자료들을 보면 일제가 위안소 설치, 운영, 관리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위안소를 설치하되 자신들이 개입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친일 중국인 단체 등을 통해 비밀리에 작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전쟁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매춘을 합법화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위안소를 본 뜻 매춘업소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성병 등 관리 문제가 대두하자 위안소 설립 때 일본 헌병대와 육군경비대 같은 군 조직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일본군과 정부가 나서 방역위원회를 구성해 위안부 관리 지침을 마련하기도 했다. 1941년엔 상하이에 ‘평강복리회’를 만들어 경찰보다 먼저 위안부를 관리 단속할 수 있었던 권한을 주기도 했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군이나 정부기관이 너무 깊이 관여하면 위험하다 생각해서다. 김 연구위원은 “위안부 징집과 위안소 설치 작업에 친일 중국인으로 구성된 자치위원회 같은 조직, 일본의 특무기관이나 병참사령부 등이 협의해 진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상하이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 정문에는 '성전을 치르는 용사들에게 일본 여성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점령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위안부는 조선인 여성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상하이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 정문에는 '성전을 치르는 용사들에게 일본 여성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점령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위안부는 조선인 여성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자료들은 중국이 위안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추진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목소리’에도 포함됐다. 중국은 독자 등재를 추진한 데 이어 2016년 한국까지 포함된 위안부 피해 8개국 공동 등재를 추진했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일본과 대화하라”며 등재 결정을 연기했다. 지난해 이스라엘과 함께 유네스코를 공동 탈퇴한 미국에 이어 유네스코 재정의 10% 가량을 책임지고 있는 일본마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화를 권유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대화는 아직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위안소는 상업적 공창이었을 뿐이며, 당시 일본 군인은 엄격한 기율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중국도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올해가 중국과 일본의 평화우호조약 체결 40주년인데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국으로선 국제적 갈등을 더 늘리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위안부 기록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셈이다.

김 연구위원은 “기록문화유산에 등재 추진 중인 자료는 모두 2,744건인데 그 중 많은 부분이 피해자 조사나 증언 자료들”이라면서 “일제의 조직적 문서 파괴로 행정문서처럼 사료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가 얼마 되지 않는 만큼 중국의 당안관 자료를 더 폭 넓게 공유하고 더 치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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