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하담을 바라보며
정약현 매일 정자 위에 올라가
부친이 묻힌 하담 쪽을 바라봐
자신의 처남 이벽으로 인해
집안에 천주교 퍼진 것을 자책
◇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은 이승훈
진산 사건이 마무리 된 뒤에도 여진은 다 가라앉지 않았다. 1792년 2월 중순 홍낙안의 척사소(斥邪疏)가 다시 쟁점화되면서, 2월 28일에 이승훈의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이승훈은 1791년 6월 24일에 평택현감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사흘 안에 향교의 문묘(文廟)로 가서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승훈은 보름이 지나도 참배할 생각이 없었다. 건물에 비가 샌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그제야 마지못해 가서 살펴보았다. 이때도 그는 공식적 참배가 아니므로 절을 올릴 필요가 없다며 절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자신이 천주를 섬기므로 다른 신은 섬기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진산 사건 당시 그는 천주교를 완전히 끊었다고 공언했던 터여서, 이 일이 사실이면 앞서의 진술이 뒤집히는 상황이었다. 평택 유생 이수(李璲)가 통문을 돌려 이 일을 성토했다. 일이 커질 듯 싶자 동생 이치훈이 다시 나섰다. 이수에게 70냥의 거금과 여러 물품을 뇌물로 주어 그 통문을 되가져오게 했다. 이 사실을 안 권위(權瑋)가 격분해서 자기 이름으로 통문을 냈다. 하지만 진산 사건이 막 끝난 뒤라 쉬쉬하며 유생들이 호응하지 않자, 용인 유생 정상훈(鄭尙勳)이 과거시험장에서 큰 소리로 성균관 유생들을 겁쟁이라고 욕했다.
이치훈은 능행을 떠나는 임금의 수레를 막고 권위와 정상훈 등이 이승훈을 다시 모함한다며 관련자를 무고했다. 정조는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보아 김희채(金熙采)를 평택에 안핵어사(按覈御史)로 파견했다. 그는 이승훈의 재종 매부였다. 임금은 채제공을 만나보고 떠날 것을 김희채에게 명했다. 채제공은 이 일의 배후에 틀림없이 홍낙안이 있음을 주지시켰고, 그가 남대문을 나설 때 이승훈이 채제공의 가짜 편지를 전해주며 한 번 더 홍낙안을 걸고 넘어갔다.
김희채는 평택에서 조사를 진행한 뒤 이승훈이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보고서에는 배례를 했다고 썼다. 그는 이를 문제 삼은 권위를 엄벌하여 매질하여 죽게 하고, 이승훈이 절을 올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도 모두 형벌로 신문했다. 하지만 홍낙안을 끌어들이려던 계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도 이승훈 형제는 기민한 대응으로 입을 막고 상대에게 덮어 씌워 또 한 번 위기를 넘겼고, 더 깊은 원한을 쌓았다.
◇ 일처리가 시원스러웠다
1782년 3월 29일에 다산은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이전까지 8대에 걸쳐 옥당에 오른 것을 집안의 자랑으로 알았는데, 다산까지 9대로 이어지는 경사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산은 이번에도 명을 받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론 쪽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진산 사건의 여진도 채 가시지 않은 터라 더 큰 구설을 부를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성 건설의 깃발을 본격적으로 올릴 준비에 몰두 중이었다. 여론 장악이 필요했다. 채제공을 불러 은밀히 말했다. “남인 중에 대통(臺通), 즉 사헌부와 사간원에 천거할만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임금은 이가환과 이익운, 그리고 다산에게도 각각 소견을 아뢰게 했다. 채제공과 이가환, 이익운 등 세 사람은 권심언(權心彦)이 가장 급하다고 입을 맞췄다. 임금은 몇 사람이나 되느냐고 물었는데, 한번 천거할 때 남인이 통상 한 명 들어가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상의해 한 사람을 찍어 지명한 것이었다.
다산은 대담하게도 무려 28명의 명단을 적어 올렸다. 각 사람의 집안과 급제 사실, 문학과 정사의 장단점까지 자세히 적어서 올렸다. “모두 시급합니다. 누구를 먼저하고 나중 할 지는 전하께서 판단하소서. 올리라시니 다 올립니다.” 그 해 6월, 관원의 성적을 고과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 때 정조는 다산이 올린 명단 중에서 무려 8명을 한꺼번에 대통에 올려 노론을 경악케 했다. 다산이 추천했던 그 나머지 인원들도 그 후 몇 해 사이에 모두 천거되어 요직에 올랐다. 정조의 가려운 데를 시원스레 긁어준 다산다운 일 처리 방식이었다.
◇ 갑작스런 부고
4월 6일, 다산은 규장각의 대유사(大酉舍)에서 왕명으로 어제(御製) 시축을 필사하던 중 진주에서 온 급보를 들었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이튿날 새벽 삼형제는 진주로 출발했다. 4월 9일에 정재원은 임소에서 세상을 떴다. 형제는 도중에 부친의 부고를 들었다. 통곡하며 달려간 처소에 차갑게 식은 부친이 누워 있었다.
책상에는 각종 문서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머리맡의 작은 상자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각 부서별로 재무 상황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완할 것을 지시한 문서였다. 세상을 뜨기 바로 전날 작성한 것인 듯하였다. 꼼꼼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채제공이 ‘통훈대부진주목사정공묘갈명(通訓大夫晉州牧使丁公墓碣銘)’을 지어 이 때 일을 적었다. 글에서 세 아들이 내려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양근 분원 땅으로 분가한 정약종은 함께 가지 않았던듯하다.
자식들은 부친의 시신을 관에 싣고 4월 20일 즈음하여 마재로 돌아왔다. 이후 문상을 받고 5월 초에 발인했다. 충주 하담(荷潭) 선영에 장사 지냈다. 자식들은 부친의 돌연한 죽음에 자신들의 책임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1784년 이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주학의 심연으로 깊이 빠져 들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자식들이 천주학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정재원은 크게 놀라 자식들 통제에 적극 나섰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아버지의 종다짐에 겉으로는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정약종은 타협을 거부하고 아예 집을 나가 부자의 인연을 끊었다.
◇ 녹아 흐르는 시신
다산시문집에 실린 ‘계부가옹행장(季父稼翁行狀)’은 막내 삼촌인 정재진(丁載進)의 행장이다. 장례 당시의 내용이 나온다. 진주서 관에 담겨 올라온 시신은 음력 4월말 무더위에 다 녹아 내리고 있었다. 충주 선영으로 발인할 때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관 밑으로 시신 썩은 물이 흥건했다.
운구를 하려면 관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녹아내려 손만 대면 문드러지는 시신을 새 관으로 옮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계부 정재진이 솜으로 코를 틀어막고 손수 시신을 새 관으로 옮겼다. 맡을 수 없는 냄새였고,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고, 눈물만 비 오듯 흘렸다.
정재진은 다산을 특별히 아껴 자신의 양자로 들일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계부가옹묘지명(季父稼翁墓誌銘)’에서 다산은 또 이렇게 썼다. “우리 형제 세 사람이 젊어서 서울에 노닐었다. 때를 만남이 불행하여 부형께 깊은 근심을 끼쳤다. 공은 특히나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마치 집에 불이 난 것처럼 하였다. 신유년(1801)에 화가 일어나자, 공은 비분하여 마치 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살 집을 주고 또 때때로 다급함을 보살펴주었다. 아아! 지극하도다.”
천주교 신앙 문제를 직접 거론한 대목이다. 안타까워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고, 비분을 참지 못했지만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의 처자식을 마재에 거두어 살 집을 마련해주고 살 도리를 챙겨준 것도 정재진이었다.
◇ 망하루의 슬픈 눈길
장례 후 3년상을 치를 여막은 마재의 집에다 차렸다. 맏형 정약현은 지붕을 새로 이고, 무너져 가는 집을 고쳤다. 수리가 끝나자 정약현은 목수에게 집 동남쪽 반 칸의 좁은 땅에 작은 누각을 짓게 했다. 가뜩이나 옹색한 마당에 웬 정자냐고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복을 벗고는 그 작은 다락에 ‘망하루(望荷樓)’라는 편액을 걸었다. 망하(望荷)는 부친의 산소가 있는 하담 쪽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망하루는 마재의 여유당 뒤편 지금의 다산 묘소에서 앞을 바라볼 때 왼편 담장 너머 얕은 언덕에 있었다. 묘소 담장 너머에는 지금도 연꽃이 가득 심긴 연못이 있다.
정약현은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정자 위에 올라가 아버지가 묻히신 하담 쪽을 바라보며 회한에 찬 모습을 보였다.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부친의 호도 하석(荷石)이고 보니, 아버지를 그리는 집이라는 뜻도 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망하루에 담긴 속내를 알아챘다. 다산은 자신이 지은 ‘망하루기(望荷樓記)’에 이 사연을 적었다.
다산은 ‘큰 형님이 지은 망하루 시에 삼가 화답하여(奉和伯氏望荷樓之作)’란 시를 남겼다.
강 위 나는 누각은 크기 겨우 반 칸인데 (江上飛樓只半楹 강상비루지반영)
하늘 빛 저 멀리 충주성에 닿았구나. (天光遙直蕊州城 천광요직예주성)
발과 창이 감춘 눈물 가려주지 않아서 (簾櫳不掩修防淚 렴롱부엄수방루)
꽃과 새도 부모 그린 그 정성을 모두 아네. (花鳥皆知陟屺誠 화조개지척기성)
도도(桃島)의 뜬 구름도 뜻이 있나 의심하고 (桃島浮雲疑有意 도도부운의유의)
탄금대에 흐르는 물, 소리 없음 슬퍼한다. (琴臺流水悵無聲 금대류수창무성)
어여뻐라 손수 심은 동산의 나무들은 (可憐手植園中樹 가련수식원중수)
봄이 오면 가지와 잎 하나하나 돋아나리. (柯葉春來箇箇生 가엽춘래개개생)
도도(桃島)는 하담 서쪽에 있는 삼각주이고, 탄금대는 그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인은 늘 발을 걷고 창을 열어 하담 쪽만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묘역에 심은 꽃나무는 봄이 오면 가지마다 새싹이 돋아나겠지만, 한번 떠나신 어버이는 다시 돌아오시지 않는다.
정약현으로서는 자신의 처남 이벽으로 인해 집안에 천주교가 퍼졌고, 이 때문에 부친의 근심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죄책감 또한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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