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조끼’ 시위가 심상치 않다. 지난 11월 17일부터 한 달 가까이 프랑스 전역을 뒤덮었던 노란 조끼 물결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 인접국가 도시들로 퍼져 나가고 있다. 정부의 유류세 인상안 철회 발표에 대해 시위대는 “우리는 빵부스러기가 아니라 바게트를 통째로 원한다”는 말로 응수했다고 한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유류세 인상안이었지만 총알은 사회 불평등 전반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시시각각 들리는 노란 조끼 시위 소식은 제24차 유엔기후변화총회가 열리고 있는 폴란드 남서부의 탄광도시 카토비체의 풍경과 대비된다. 지난주 말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시민들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더 강력한 규제와 행동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무장한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시위대는 ‘지구를 다시 위대하게’, “나는 스모그 없는 겨울을 꿈꾼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렇다면 파리의 노란 조끼 시위대와 카토비체의 기후변화 시위대들은 상반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까. 전자는 탄소세 성격의 유류세 인상 계획에 분노해 거리로 나섰고, 후자는 탄소세처럼 더욱 강력한 규제를 각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두 목소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란 조끼 시위의 밑바닥에 깔린 불만은 유류세 인상이 아니라 누적된 빈부격차 확대와 교육, 의료, 연금 분야의 복지 축소였다. 마크롱 대통령이 단행한 부유세 폐지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외신에 따르면 노란 조끼 시위대는 자신들이 기후변화 정책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로 비쳐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전가하는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지 기후변화 대응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노란 조끼 시위대의 핵심 요구에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주택 단열사업 지원’ 등이 포함돼 있다.
카토비체 기후변화총회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97개 당사국이 신기후체제의 헌법 격인 파리협정의 이행계획에 합의하는 것이 목표다. 총회는 언제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전투는 대부분 ‘부담의 정의로운 배분’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올해도 다른 것 같지는 않다. 2020년부터 매년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제공하기로 했던 1,000억 달러의 성격과 보고 방식 등이 최대 쟁점으로 남아 있다니 말이다.
파리와 카토비체 두 도시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 속에서는 ‘정의’라는 개념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우리가 새겨야할 교훈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방식의 기후변화 정책은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과, 기후변화 대응은 정의로운 방식의 사회 전환이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다.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존재한다. 패자는 결국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할 때 사회적 갈등은 폭발하게 돼 있다. 우리 앞에는 노후 경유차 퇴출, 경유 상대가격 조정,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등 휘발성이 높은 정책들이 놓여 있다. 방향이 옳다는 것이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잠재적 패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정의’ 관점에서 정책을 세밀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생계를 노후 경유차에 의존하고 있거나 전기요금 탓에 냉난방도 제대로 못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는 것이다. 왼쪽 주머니에서 더 걷은 세금은 반드시 오른쪽 주머니로 돌려준다는 원칙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환경과 경제를 두루 살피는 조직의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도 갈탄 의존도 축소 방안을 ‘성장ㆍ구조전환ㆍ고용위원회’가 다루고 있는 독일 사례를 눈여겨보았으면 한다.
안병옥 고려대 OJERIㆍ환경생태공학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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