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정세랑 "문단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 기괴해지는 곳"

알림

정세랑 "문단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 기괴해지는 곳"

입력
2018.12.10 04:40
22면
0 0

지난해 한국일보문학상 소설가 정세랑

단편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내

정세랑 작가가 서 있는 곳은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사옥 옥상이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의 표제작은 서울 신사동 민음사 사옥 옥상에서 태어났다. 편집자 시절, 정 작가는 옥상에 올라 도시의 외로움을 관찰했다. 배우한 기자
정세랑 작가가 서 있는 곳은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사옥 옥상이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의 표제작은 서울 신사동 민음사 사옥 옥상에서 태어났다. 편집자 시절, 정 작가는 옥상에 올라 도시의 외로움을 관찰했다. 배우한 기자

소설가 정세랑(34). 명랑의 ‘랑’을 문학적 돌림자로 쓰는가 싶은 이름.

역시나 명랑한 단편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창비)를 냈다. 데뷔한지 9년쯤, 장편소설 6편을 쓰고서야 묶은 첫 소설집이다. 단편으로 이름을 쌓아 올리고 장편에 도전하는 보통의 순서를 정 작가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이를테면 별종이다. 작가로 데뷔한 경로도, 쓰는 소설도 문단에서 말하는 ‘보통’과 다르다. 2010년 장르문학 잡지에 장편이 당선돼 등단했고, 줄곧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의 경계에서 썼다.

“정상적 루트 바깥의 작가는 생존하기 쉽지 않아요. 어떻게든 다음 책을 낼 수 있는 작가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했어요.”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정 작가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고단할까. “막 빙글빙글 돌아 왔는데, 재밌었어요. 방황하면서 고유의 색을 얻기도 했고요.”

지난해엔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문단에선 한동안 제가 뭘 하는지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책도 팔리고 독자도 분명 있는데, 이상한 침묵이 있었죠. 한국일보문학상이 ‘네가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사실은 알고 있다. 바뀌고 있으니까 조금 더 써 봐라’ 하고 격려해 준 것 같아요.”

소설집은 지극히 정세랑스럽다. 이런 식이다. 과자 공장에서 귓바퀴를 잃은 남성의 귀에서 과자가 자라고, 그는 그 과자를 먹여서라도 깡 마른 애인이 건강해지기를 바란다.(‘해피 쿠키 이어’) 신비의 주문으로 불러 낸 장승 닮은 남편이 정수리에 입을 대고 나의 절망을 쭉 빨아먹고, 나는 행복해진다.(‘옥상에서 만나요’) 언니를 과로에 잃은 나와 친구들이 전 세계 돌연사맵을 만들어 거대한 시스템이 지운 이름들을 다시 쓴다.(‘보늬’)

소설은 환상특급을 타고 안드로메다 혹은 전생으로 휙 날아가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 작가는 늘 ‘여기’의 이야기를 한다. 자유, 이름, 안전, 미래 같은 걸 가지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 판타지는 정 작가가 묵직한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려고 쓰는 장치다. “목 넘김에 비유하면 어떨까요. 흡수하기 좋은 부드러움으로 쓰는 거예요. 현실에 셀로판지 한 장 대는 느낌으로 판타지 얹는 걸 좋아해요. 판타지 요소가 있으면 약간 거리를 두며 읽고,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되거든요.”

정 작가는 스스로의 말에는 셀로판지를 대지 않았다. 대형 출판사 편집자였던 그의 문단에 대한 신랄한 평가. “한 사람 한 사람은 좋은데, 모이면 기괴해지는 곳이에요. 집단 무의식 같은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공모전에서 친인척이나 제자를 뽑는다든가, 그런 걸 많이 봤어요. 요새는 공정하려고 노력을 하시는데, 악습은 남아 있어요. 로테이션을 자주 하는 게 중요해요. 큰 결정을 다양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정 작가는 문단 권력에 아첨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운 털 박히고 있다는 거 아는데, 별로 신경 안 써요. 문단이 탁한 건 맞잖아요. 작가들도 자꾸 문제를 일으키고요. 정말로 신문 사회면에서 작가 이름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왜 범죄자들과 한 덩어리가 돼야 해요?”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 이야기였다. “최영미 시인님, 공지영 작가님 같은 분들께 되게 감사한 마음이에요. 자기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고 계시는 거죠. 본인뿐 아니라 뒤에 오는 여성들을 위해서도 그러시는 것일 테고요.”

“와, 크리스마스네요.” 빨간색 목도리와 초록색 소설집 표지를 놓고 정세랑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표지 그림은 웹툰 ‘며느라기’를 그린 수신지 작가가 그렸다. 배우한 기자
“와, 크리스마스네요.” 빨간색 목도리와 초록색 소설집 표지를 놓고 정세랑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표지 그림은 웹툰 ‘며느라기’를 그린 수신지 작가가 그렸다. 배우한 기자

정 작가는 “기본적으로 여성 독자를 위해 쓴다”고 했다. “5년 전쯤까지는 여성 독자들이 남성 작가를 더 좋아했어요. 남성 작가랑 사인회를 같이 하면 남성 작가 앞엔 여성 30명이 줄을 서고 제 앞에는 남성 7,8명이 서는 거예요. 연애가 아니고 문학인데 왜 그렇게 이성에게 끌리는지 의문이었죠(웃음). 요새는 여성들이 여성 작가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하고 꾸준히 읽어 주세요. 정말 큰 힘이에요.” 장르적이어서인지, 정 작가에겐 남성 팬도 많다. “30%는 남성 독자 같아요. 여성 서사에 관심을 가져 주는 분들이 있다니 희망적이지 않나요?”

요즘 여성들의 결혼 고민은 ‘언제, 누구와’가 아니라 ‘하느냐, 마느냐’다. 이혼은 실패요, 결혼만이 정상인 세계를 거부한다. 수록작 ‘웨딩드레스 44’ ‘이혼 세일’에서 정 작가는 그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 준다. “모두가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안 해도 되는 것”, 정 작가가 내린 결혼의 이상적 정의다. 그는 결혼 하는 쪽을 택했다. “제가 결혼한 2014년엔 비혼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 않았어요. 망설였지만, 시대를 앞서 가는 결정을 할 순 없었어요. 덕분에 좋은 작품들을 쓸 수 있었네요(웃음).” 정 작가의 솔직한 결혼 후기. “결혼하고 나니까 사회 전체가 저한테 무례하게 굴더라고요. 개가 양떼를 우리에 몰아 넣듯, 한 가지 틀에 제 삶을 밀어 넣으려 하는 거죠.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꼭 결혼 제도 안에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결혼을 고쳐서 사용하는 중이에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진주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