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헤지펀드 엘리엇ㆍ獨 엘리베이터社, 잇따라 정부 제소
삼바ㆍGM 관련 제소도 우려… “정권교체 후 정책 뒤집은 탓”
#. 지난 4월 13일. 법무부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발신자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부당하게 개입해 합병 건이 주주총회를 통과했고, 이로 인해 삼성물산 주주였던 우리가 피해를 봤으니 정부가 손해를 물어내라”는 내용이었다. 엘리엇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제도에 따라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제소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수차례 엘리엇과 접촉했지만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고 엘리엇은 결국 지난 7월 ICSID에 “7억7,000만달러(약 8,600억원)를 물어 달라”며 우리 정부를 정식 제소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조원대 ISD 소송의 최종 결론 시점이 내년 상반기로 전망되면서 ISD를 둘러싼 우려와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론스타와의 소송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합의를 본다 해도, 조 단위 배상금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올해만 해도 엘리엇에 이어 독일 엘리베이터업체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 과정을 문제 삼아 ISD 대열에 합류했다. 검찰 수사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산업은행의 GM 지원 건도 향후 ISD 제소가 우려되는 사안들이다. 더 늦기 전에 ISD 리스크에 대한 근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한국에 ISD 잦은 이유
7일 관련 부처와 법조계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최근 세계에서 ISD를 가장 많이 제기 당하는 나라다. 역사상 ISD 최다 피소국은 아르헨티나(작년 말 기준 누적 60건)지만, 지난 국정감사에서 ‘최근 세계에서 ISD를 가장 많이 당하는 나라가 어디냐’는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한국”이라고 답했다.
지금까지 외국계 헤지펀드 등이 우리 정부에 제기한 ISD 누적 청구 금액은 알려진 것만 6조6,000억원에 달한다. ISD는 소송을 치르는 데만 수백억원이 들고, 패소하면 훨씬 큰 손실이 불가피한 점도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많은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투자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식으로 ‘투자’의 개념을 굉장히 넓게 규정해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ISD를 제기하기 쉽다”며 협정 조항에 자체에 맹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정치적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다. 한 대형로펌 관계자는 “이제까지 ISD 제소를 많이 당해온 개발도상국들은 정세 급변에 따른 무리한 정책 추진이나 변경이 주된 원인이었다”며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선진국에 비해 정권교체 이후 이전 정부의 정책이나 결정을 급히 뒤집으려는 경향이 한 원인이 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관련 부처 담당자는 “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날수록 각종 소송도 함께 많아질 수밖에 없으며, ISD가 유독 우리 정부에만 집중된다고 보긴 어렵다”고 반박했다.
◇커지는 딜레마
ISD 제소에 맞서는 정부의 딜레마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로선 지난 정부의 문제 있는 정책 결정을 바로잡거나(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바이오) 주력산업을 보호(GM 지원)하는 과정에서 생긴 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엇과의 소송에서 보듯, ISD 제소에 수비수 역할을 하는 법무부는 한 지붕 아래 검찰의 수사가 종종 그 수비를 무력화시키는 걸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법무부는 엘리엇에 보낸 ISD 답변서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뇌물의 전제조건인 ‘묵시적 청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 결과를 인용하며 방어 논리를 폈다. 하지만 검찰은 오히려 기업들이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을 뇌물로 봐야 한다며 상고했다. 법원도 지난 8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항소심에서는 같은 사안을 놓고 ‘묵시적 청탁’을 인정했다. 이는 앞으로 엘리엇과 맞설 법무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바이오 건에서도 정부가 내린 ‘분식회계’ 결론을 법원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정부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 사법체계가 인정하는 셈이어서 법무부의 방어 논리도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ISD의 충격을 체감시킬 사실상 첫 사례인 론스타 소송의 결론도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 2016년 6월 최종심리를 마친 론스타 소송은 지난달 16일로 예상됐던 ICSID의 절차종결선언이 뚜렷한 설명 없이 늦어지고 있지만 현재로선 내년 상반기쯤 최종 판가름 날 거란 전망이 많다.
앞서 론스타 산하 법인들은 지난 2012년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투자금 회수 과정에서 차별적 과세를 해 손해를 입었다”며 47억달러(약 5조2,640억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국제 중재 법률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불리하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일각에선 “3조원대 배상 판결이 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만약 우리 정부가 론스타에 조 단위 안팎의 적지 않은 배상금을 물게 된다면 그 책임을 두고 거센 후폭풍이 예상된다. 외환은행 매매 인허가를 담당했던 정부 부처, 세금을 매긴 과세당국은 물론 이를 추인한 사법부에까지 세금 출혈에 대한 전방위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하지만 여기엔 ‘먹튀는 안 된다’는 여론 정서를 등에 업고 정부, 법원을 압박했던 정치권, 언론, 시민단체 등도 자유로울 수 없다. 표면적인 행위는 공무원들의 손 끝에서 벌어졌지만 사실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란 지적도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론스타 소송에 대해 “예단할 순 없지만, 100% 우리 쪽 승소가 아니라면 배상액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판결보단 양자간 합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며 “1조원 안팎의 합의금으로 사건이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곤혹스러워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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