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만나
60억달러 신규 재정 지원 약속
고강도 제재 美 겨냥 의도 해석
중남미 거점으로 활용 나설 듯
러시아가 극심한 경제난에 빠진 베네수엘라를 위한 ‘구원 투수’ 역할을 또다시 자처하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60억달러(약 6조7,140억원)의 신규 재정 지원이라는 ‘선물’을 안긴 것이다.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발판 삼아 중남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6일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마두로 대통령은 이날 베네수엘라 국영 VTV를 통해 “우리는 (러시아로부터) 석유 산업에 50억달러, 금광 산업에 10억달러 이상의 투자 보증을 각각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러시아가 60만톤의 제빵용 밀 공급 계약에 서명하고, 무기 유지보수도 지원키로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4일 러시아를 방문해 이튿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 결과를 이같이 설명한 것이다.
실제로 두 정상의 만남은 마두로 정권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변함없는 지지 표명’으로 요약된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시작부터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걸 모스크바는 잘 알고 있다”면서 재정 지원 의사를 내비쳤다.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붕괴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언급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두로 대통령도 회담이 ‘좋은 소식’을 안겨 줬다면서 “러시아와의 경제적 유대를 확대하길 고대한다”고 답했다. AP통신은 “러시아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시했다”고 전했다.
회담에 앞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마두로 대통령은 재정 지원을 특별히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를 찾았다”며 “두 정상의 대화도 베네수엘라가 필요로 하는 원조 방안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이때 러시아의 지원 규모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진 않았는데, 바로 다음날 마두로 대통령이 ‘60억달러 지원’을 공표한 사실을 감안하면 원조 대상국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는 마두로 정권 출범 후 나라 곳간이 거덜난 상태다. 석유 수출로 먹고 사는 상황에서 ‘저유가의 공습’으로 직격탄을 맞았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국민들이 식량과 의약품 등 생필품도 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예상한 베네수엘라의 올해 물가상승률은 무려 100만%가 넘는다. 이에 더해 국내 인권 탄압을 이유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취한 금융제재로 수출길마저 꽁꽁 막혀 버렸다.
그러나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이 닥칠 때마다 러시아의 재정 지원으로 고비를 넘겼다. 최근 4년간 베네수엘라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 원조 규모는 100억달러를 초과한다. 지난해 10월 말 국영 원유회사인 페데베사(PDVSA)의 디폴트 위기 때에도 10억달러를 빌려준 국가는 바로 러시아였다. AFP통신은 “베네수엘라는 국제적 고립이 심화하면서 점점 더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의도는 결국 베네수엘라를 교두보로 삼아 중남미 지역에 외교적ㆍ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반미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푸틴 대통령이 마두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테러에 해당하는 어떤 행위도, 무력으로 상황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비난한다”고 언급한 것도 베네수엘라에 고강도 제재를 단행한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의 야심은 유럽과 중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며 “중남미에 대한 모스크바의 개입은 자유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개입으로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되찾은 것처럼, 중남미 지역에선 베네수엘라를 ‘제2의 시리아’와 같은 거점으로 활용하는 게 러시아의 속내라는 뜻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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