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이문영 ‘유사역사학 비판’
“저는 자주 지도를 펼쳐 동북아 지역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요녕, 길림, 흑룡강의 동북 3성은 지금 중국 땅이지만, 장차 한반도와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바다로, 하늘로, 그리고 마침내 육지로…. 2억이 훌쩍 넘는 내수시장이 형성되는 것이고,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사람이 나가고, 대륙의 에너지 망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남북철도 공동조사 사업을 앞두고 있던 지난달 25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에다 남긴 글이다. 이런 문장, 괜찮을까.
다른 문장으론 이런 것도 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정옥자 서울대 교수가 10년 전 했던 강연 중 일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재야사학이 붐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이 재야사학의 특징은 굉장히 애국적이라는 거예요. (중략)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만주를 답사하고 다니면서 ‘여기도 우리 땅’이라며 태극기를 꽂고 의식 같은 걸 치르는데, 정말 애국적이고 감격스럽고 가슴 뛰는 일이지만 중국은 그걸 보고 동북공정을 시작한 거죠.”
이 두 글은 가깝다면 얼마나 가깝고, 멀다면 또 얼마나 멀까.
참고할 만한 사례도 있다. 독일 통일이다. 알려졌다시피 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은 유럽에 거대한 사회주의 방어벽을 쌓고 싶어 했다. 나치 독일에 대한 ‘징벌 의지’까지 맞물려 위성국 폴란드의 영역이 최대한 확대됐다. 독일 통일 논의가 시작됐을 때, 만약 통일로 강성해진 독일이 예전 같지 않을 소련과 폴란드를 상대로 옛 영토를 요구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때 옛 영토를 온전히 포기한다고 확답한 이가 바로 리하르트 바이츠체커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가 쓴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창비)를 보면, 당시 같은 기민당 소속이었으나 국내 여론 눈치를 보느라 머뭇대며 답을 미루려 했던 헬무트 콜 총리의 태도 등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멋지고 감동적인 연설 몇 번 했다고 ‘독일의 양심’이라 추앙받는 게 아니다. 외국 언론, 특히 미국 쪽 언론에서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러시아 쪽에다 더 발톱을 세우지 않으려는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두고 ‘주저하는 리더십’이라 부르는 것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먼 옛날 우리가 실은 엄청난 대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유사역사학은, ‘괴짜 역사 덕후들의 놀잇감’이나 ‘일부 역사학자들의 이슈’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문제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라는 2013년 8ㆍ15경축사로 역사학계를 경악시킨 박근혜 대통령 같은 이가 사라진다고, 그것으로 끝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김광석 ‘광야에서’) 같은 노래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던 이들이라면 더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할 문제다. ‘유사역사학 비판’은, 한번쯤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딱 알맞은 책이다.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역사소설 여러 편을 쓴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1990년대 초부터 유사역사학 비판 작업을 해왔다. 사학과 출신으로 당시 PC통신 하이텔의 역사 동호회 한국사동호회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환단고기’ 같은 책을 떠받들길래 그건 아니라고 했다가 온갖 욕을 다 들었던 경험이 출발이었다. ‘애국애족’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온갖 광풍을 다 겪으면서 유사역사학을 비판한 책 ‘만들어진 한국사’를 2010년 냈고, 최근엔 한 경제지 온라인판에서 ‘물밑 한국사’를 60회 연재했다. 유사역사학 쪽에서 이 연재를 중단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자 “신문사는 권위 있는 학회 두 곳에 내용에 문제가 있는지 문의하기까지 했”고 “당연히 일반적인 역사학계 주장에 위배되는 바는 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유사역사학 비판
이문영 지음
역사비평사 발행ㆍ384쪽ㆍ1만7,000원
책의 뼈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최동(의사) - 문정창 -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 - 이유립(환단고기 공개) - 임승국(환단고기 번역)’으로 이어지는 유사역사학 계보 추적이다. 특히 환단고기를 보존해오다 1980년에야 공개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립이, 실은 1960~7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환단고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그 시기 이유립이 발행한 잡지 ‘커발한’ 추적을 통해 분석해 보인다.
또 하나는 유사역사학의 원형질이 실은 일제의 침략사관이란 점이다. 일제는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뛰어넘어 조선에 이어 중국을 차지하고 대동아공영권으로 미국과 맞짱을 뜨려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시아가 알고 보면 다 같은 민족이고 다 연결돼 있다고 주장해야 했다. 이 황당한 주장에서 주어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꾼 게 유사역사학이다. 한민족과 이스라엘이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도 다 일제에서 나왔다. 그래서 최동-문정창-안호상-이유립-임승국은 모두 친일파이거나 일본식 국가주의자다. 일제시대에 들었던 익숙한 얘기를 주어만 바꿔서 재활용한 셈이다. 유사역사학이 기존 역사학을 친일매국이라 비판하는 게 코미디가 되는 이유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크레도 콘솔란스(Credo Consolansㆍ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믿는다)’다.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으니 믿는다. 이 표현은 원래 신학논쟁에서 유신론의 한 갈래를 지칭하는 말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왜?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내 마음이 더 편안해지니까. ‘나는 수백억 역사의 별먼지’라는 진술이 너무도 불만족스러우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믿는 것이다. 개인적 마음의 평화, 이너 피스(Inner Peace)를 위한 것이라면 이 또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이란 이름의 크레도 콘솔란스는 그 원인이 지독한 열등감이라는 게 문제다. 열등감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바깥의 적에게 과도한 증오를 투사한다. 저자는 이를 결론부의 딱 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역사는 증오하기 위해서 배우는 게 아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