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절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날카롭게 사회를 비판해온 김민섭의 신간이다.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저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생계를 위해 맥도날드 물류창고에서 일한 경험(‘나는 지방의 시간강사다’)과 대학에서 쫓겨나 대리운전을 한 경험(‘대리사회’)을 글로 풀어 사회를 통찰해왔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일상의 공간에서 수집한 언어를 다룬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학교와 회사, 집에서 주입되는 언어가 우리를 어떻게 통제하고 지배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이전에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던 일상의 언어들이 조금은 다른 눈높이로 다가왔다”라며 “’대리사회’가 우리 사회의 몸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은 그 언어의 기록이다”라고 설명했다.
‘대리사회’에서 우리 모두 스스로 삶의 주체라고 믿지만 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에 지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는 규정된 언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훈(訓)이 어떻게 시대의 욕망 안에 개인을 가두어왔는지를 얘기한다. 주위에 무수한 훈이 있지만 저자는 학교와 회사, 집에 얽힌 훈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가령 학교의 교훈과 교가는 대표적인 훈이다. 저자가 국내 공립고등학교의 교훈을 낱낱이 분석한 결과, 국내 149개 공립여자고등학교의 교훈에서 주로 사용된 키워드는 ‘순결’ ‘정숙’ ‘예절’ ‘배려’ 등이고, 168개 공립남자고등학교의 교훈에서 많이 쓰인 키워드는 ‘단결’ ‘용기’ ‘개척’ ‘책임’ 등이었다. 저자는 “여고의 것이 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라면, 남고의 것은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학창 시절에서부터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돼 간다.
학창 시절을 거쳐 회사 생활로 접어들면 사훈에 의해 개인은 철저히 규정된다. 경영방침, 경영목표, 경영철학 등으로 은밀하게 개인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정한 대기업집단과 준대기업집단 60곳의 사훈을 일일이 조사하고, 회사에 속한 개인을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회사 내에 규정된 언어들이 그 구성원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훈의 시대
김민섭 지음
와이즈베리 발행ㆍ246쪽ㆍ1만5,000원
마지막으로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들도 하나의 훈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의 이름이다. 저자는 “사실 학교나 회사보다도, 평범한 개인의 의지가 있는 그대로 반영된 일상의 공간들이, 시대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했다. 1999년 ‘삼성 쉐르빌’에서부터 시작된 아파트 브랜드가 2000년대 중반 프리미어 팰리스, 메가트리아, 더테라스, 트리지움 등 뜻을 알 수 없는 서브 브랜드로까지 나눠지게 된 배경에는 주거 공간을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훈이 액체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잃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훈들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유를 지켜내야 그 공간에서 대리인간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 스스로 교가를 바꾼 강화여고 이야기와 저자가 비행기표를 양도하기 위해 벌렸던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성공의 후일담에서 그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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