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정약용과 정약종
◇긴장성 두통
진산 사건이 한창 숨 가쁘게 진행될 당시, 다산은 11월부터 한 달 넘게 앓다가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추슬렀다. 사촌 윤지충이 사형을 당하고, 홍낙안 이기경의 상소가 급기야 다산 자신을 물고 들어가면서 상황이 자못 급박했다. 노심초사 좌불안석하던 일이 막상 이기경의 유배형으로 일단락되자 다산은 긴장이 풀리면서 호된 몸살과 급성의 긴장성 두통에 시달렸던 듯하다. 시문집에 수록된 ‘장난 삼아 두통 노래를 지어 의사에게 보이다(戲作巓疾歌示醫師 희작전질가시의사)’란 시는 조금 숨을 돌린 뒤 12월 들어 지은 작품이다.
콕콕콕 찌르다가 다시금 어질어질 (鑿鑿復旋旋 착착복선선)
송곳으로 찌르고 굴대가 빙빙 돌 듯. (鑿如錐鑽旋如鏇 착여추찬선여선)
괜찮다가 다시 와서 빙빙 돌다 또 찌르니 (忽去復來旋復鑿 홀거복래선복착)
머리 속에 구름 안개 자옥하게 온통 낀 듯. (腦袋一冪迷雲煙 뇌대일멱미운연)
머리통이 하늘 닮아 몸뚱이에 얹혔는데 (顱圜象天百體戴 로원상천백체대)
네가 와서 찔러대니 하늘 장차 뚫어질 듯. (汝來鑿鑿天將穿 여래착착천장천)
의사가 하는 말이 혈해(血海)가 허한 탓에 (醫云血海虛 의운혈해허)
풍사(風邪)가 머리에 온통 가득하다면서 (風邪據其巓 풍사거기전)
틀림없이 귀신의 장난이라 하는구나. (非非定是鬼捓揄 비비정시귀야유)
묵은 뿌리 썩은 잎을 달이는 것 그만두고 (陳根腐葉休熬煎 진근부엽휴오전)
약쑥 심지 주먹만큼 큼지막이 비벼다가, (撚取艾炷大如拳 년취애주대여권)
귀신 소굴 태워 부숴 넋 옮기게 한다면 (灼破鬼穴令魂遷 작파귀혈령혼천)
매운 불에 귀신 떠나 마음조차 시원하리. (火烈鬼去心豁然 화렬귀거심활연)
찌를 듯 쑤시다가 어질어질 빙빙 돈다. 미운이 서린 듯이 머리가 온통 흐리멍덩하다. 의사는 빈혈로 나쁜 기운이 머리까지 침범한 탓이며, 귀신이 장난질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묵은 뿌리나 썩은 잎의 약재를 달여 먹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다. 주먹만한 쑥을 한웅큼 비벼 아예 정수리에 뜸을 떠달라고 했다. 뜸으로 귀신의 소굴을 싹 태워버려 내 몸에서 귀신이 떠나가게 할 수만 있다면 더 없이 통쾌할 것 같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귀신의 야유로 표현한 데서 당시 다산의 놀란 심정을 한번 더 가늠케 된다.
그 아픈 와중에도 다산은 정조가 하문한 ‘시경강의’ 700조목에 대해 촘촘한 답변을 작성했다. 12월 2일에 이를 제출하자 임금은 큰 칭찬을 내렸다. 관련 내용은 앞선 제10회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아버지의 상경과 셋째 형 정약종
해가 바뀐 1792년에 다산은 31세가 되었다. 1월에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정재원이 공삼(貢蔘), 즉 공물로 바칠 인삼을 관리하는 차사원(差使員)으로 차출되어 잠깐 상경했다. 말이 공무이지 정재원의 갑작스런 상경은 휴가를 겸해 정초를 집에서 보내라는 채제공의 배려였을 것이다. 혹은 진산 사건 이후 예민한 시기에 전후 사정을 묻고, 자식들의 천주학 신앙을 한번 더 단속하기 위해 자청한 상경일 수도 있겠다. 다산은 다행히 빗겨갔지만, 사위인 이승훈은 자못 위태로웠다.
다산은 1월 20일경 다시 진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동작나루에서 전송했다. 다산은 이때의 심경을 “나루 어귀 배가 멀리 떠나버리니, 백사장서 말 세우고 바라보누나. 시든 살 적 늙으신 모습 마음에 품고, 얇은 갓옷 봄추위만 염려한다네(渡口移舟遠 도구이주원, 沙頭立馬看 사두립마간. 鬢凋懷暮景 빈조회모경, 裘薄念春寒 구박념춘한)”라고 읊어 작별을 슬퍼했다. 이해 4월 9일, 정재원은 진주에서 63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서, 이때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정재원의 근심은 다산과 정약전보다 셋째인 정약종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약종은 세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786년 3월경 권일신을 대부로 세워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약전’에는 24세 때인 1784년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였지만 이벽의 처신을 그르게 여겨 이후 4,5년간은 열심히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블뤼는 정약종에 대한 모든 내용은 정약용의 신뢰할만한 기록을 따랐다고 했으니, 이 부분은 다산이 남긴 증언에 기초한 것이 분명하다.
◇부친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처음에 미적대던 정약종은 영세를 받고 난 후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열심으로 신앙생활에 몰입했다. 1791년에 다산과 정약전이 신앙을 등지는 듯한 행동을 할 때에도 그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아버지는 정약종이 너무도 고지식하고 엄격하다며 여러 차례 나무랐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고 썼고, 또 “1791년 형제들과 다른 벗들이 배교하는 비참함에 빠졌으나 그만은 배교하지 않았다. 부친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신앙을 실천했으며 효를 다하였고, 그에 대한 나쁜 대우도 흔들림 없는 인내심으로 견디어 냈다”고 적었다. 달레도 ‘조선천주교회사’에서,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를 믿는 것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를 비난하고 자식들에게 엄금하였다”고 썼다.
진산 사건이 이 같은 갈등의 정점이었다고 볼 때, 1792년 봄 상경 당시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강하게 배교의 다짐을 받으려 했던 듯하다. 하지만 정약종은 조상에 대한 제사마저 거부하며 뜻을 꺾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집안의 갖은 탄압을 견뎌야 했고, 마침내 1792년에는 양근의 분원 땅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신앙 활동에 뛰어들었다.
진산 사건은 겉으로는 공서파의 처벌 주장이 철퇴를 맞아 신서파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때 조선천주교회의 주교로 일컬어지던 권일신이 고문을 받아 유배지로 가던 도중 장독을 못 견뎌 죽었고, 그밖에 이승훈과 정약용 정약전 형제 등이 공개적인 배교 의사를 표시하고, 그밖에 충청도 내포 땅의 사도로 존경받던 이존창이 배교의 약속을 하고 풀려나는 등,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초기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던 지도층이 거의 와해되는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정약종은 흔들림 없는 열심한 신앙과 투철한 교리 이해로 점차 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섰다.
◇신선술과 천지개벽을 믿었던 정약종
정약종은 젊어서부터 다른 형제들과는 전혀 달랐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과거 공부에 몰두할 때 그는 오히려 신선술에 관심을 쏟았다. 황사영은 큰형 정약현과 이벽의 누이 사이에서 난 딸 정난주 마리아와 혼인한 다산의 조카 사위였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를 여는 단초가 된 ‘백서(帛書)’에서 정약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 장생불사하려는 뜻이 있어, 천지개벽의 주장을 믿었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변하여 바뀔 때는 신선 또한 사라짐을 면치 못할 테니 끝내 장생의 도리는 아니다. 배울 만한 것이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젊어 도교에 빠져 천지개벽설을 믿었다. 말이 도교이지 ‘정감록’ 계통의 유사종교에 심취해 있었다는 얘기다. 초기 천주교 신자 중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정감록’ 신앙에 빠졌던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다. 캄캄한 암흑 세상이 가고 새로운 세상이 곧 온다, 후천(後天)이 활짝 열려 믿는 자들에게만 늙지도 죽지도 않는 도화낙원이 열린다, 믿는 자만 들림을 받아 불사의 꿈이 열린다는 환상을 멀쩡한 사대부가의 자제가 꾸고 있었다. 젊은 이승훈도 그랬고, 김건순과 강이천도 그랬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한 차례 따로 더 쓰겠다.
다산과 형님 정약전이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때, 정약종은 천주교에 올인했다. 뒤늦게 붙은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주교요지’라는 천주교 교리 설명서를 썼다. 1795년 이 책을 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엄지 손가락을 척하고 올렸다.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후 이 책은 조선천주교회가 공인하는 교리서가 되었다. 정약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성교전서’의 편찬에 돌입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서학서를 종합해서 한 권의 결정판을 만들겠다는 야심이었다. 하지만 이 소원은 절반쯤 작업이 진행된 상태에서 그가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개벽 신앙과 재림 예수 신앙의 접점
‘정감록’은 거의 재림 예수 신앙의 조선 버전이다. 십승지를 찾고, 미륵 세상을 꿈꾸며, 도화낙원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들이 원하던 바로 그 복음이었다. 이승의 삶은 고통스러워도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부자집 잔치상 아래서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개처럼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
천주의 계명을 지키고, 성호를 긋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차별 없이 천국에 갈 수가 있다. 그곳에는 양반 상놈의 구분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다고 했다.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공평한 세상이었다. 실제로 정약종은 영애(令愛)란 이름의 여종을 단 7냥이란 상징적인 금액에 속량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실행에 옮김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이때 다산은 천주교와 완전히 결별한 상태였을까? 대외적으로는 배교 상태에 있었지만 특별히 그럴만한 극적인 계기가 없었다. 윤유일이 북경 주교에게서 제사 금지의 교리를 전해 듣고 이를 전달한 것이 1790년이었다. 이 일로 문제가 불거진 것은 1791년의 진산 사건이 처음이었다. 제사 금지 조항에 대해 심정적 거부감을 지녔을 수는 있어도, 이 정도 일에 그토록 간절했던 신앙이 싸늘하게 식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다산 형제는 벼슬길에 몸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정재원의 엄명도 있었던 데다, 자칫 경솔한 행보가 자신을 두둔하는 임금 정조와 채제공에게 큰 누가 될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산의 신앙 생활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긴 휴지기로 들어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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