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레임덕(lame duck)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레임덕이라는 말. 사전적 정의는 ‘임기 만료를 앞둔 공직자를 절름발이 오리에 비유한 말’이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보통 ‘최고권력의 힘이 빠졌다’는 의미로 쓴다. 그런데 조금 빠르다.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은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이 처음 입에 올렸다. 5일 같은 당 정진석 의원과 하는 세미나 ‘열린 토론, 미래’에서다. 김 의원은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대로 내려갔다”며 “사실상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레임덕 앞에 ‘사실상’을 붙인 게 재미있다. 100% 자신하지 않지만 어쨌든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의미, 대놓고 독한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김 의원의 천성이 묻어난다.
◇레임덕? 실체가 뭐야
김 의원이 ‘사실상’을 붙인 데서도 짐작하듯이 사실 아무도 모른다. 국정 지지도가 대선 때 득표율 아래로 떨어지면 레임덕일까?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 하락세가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레임덕일까? 대통령의 말이 여당에게도 먹히지 않으면 레임덕일까? 지지층 과반이 야권으로 등 돌리면 레임덕일까? 알 수 없다. 레임덕이란 말은 있지만, 실체는 모호한 거다.
그렇다면 정치권에서 레임덕이란 말은, 부르는 자의 것이다. 레임덕을 언급함으로써, 레임덕이 오는 효과를 얻으려는 의도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처한 상황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부정적인 여론, 경제 위기감, 그로 인한 경제 투톱(경제부총리ㆍ청와대 정책실장) 교체로 대통령의 ‘능력’에 의구심이 싹 트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는데, 청와대가 되레 특별감찰반의 비위 의혹으로 공직기강이 무너졌다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상황은 어떤가. 민주당 내에서조차 청와대를 향한 일침이 나왔다. 균열의 조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레임덕은 말하는 자의 것
이를 놓치면 야당이 아니다. 6선 구력의 김 의원이 “사실상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한 건 여러 노림수가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하니 실제 레임덕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나 그러길 바라는 희망이 담긴 표현이다. 그래서 “레임덕이다”가 아닌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한 거다.
일종의 ‘낙인 효과’다. 사람인지라, 이런 말을 들으면 ‘어, 진짜 레임덕이 시작됐나?’라고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참여정부 시절 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낙인 찍었던 사례와 비슷하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달리 생각할 여지가 많지만, 그 때는 전 언론이 그 말로 도배됐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세가 견고했던 임기 초라면 박 전 대통령이 그런 표현은 쓰지 못했을 테다.
레임덕 언급으로 야권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도 있다. 최고 권력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면 가장 반길 이들은 정권의 반대 세력이기 때문이다.
점점 기정사실로 돼가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도 돌파구가 되기 쉽지 않다. 정치ㆍ행정 컨설팅그룹 ‘보솔’의 김성현 파트너의 말이다. “남북 관계의 진전도 피로감이 쌓인 상태다. 김 위원장이 답방을 하더라도 양쪽의 지지율이 동반 상승할 것이다. 각각의 진영논리를 강화해 양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진짜 레임덕이 시작된 건지 아닌지는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봐야 알 것 같다. 그런데 하나 확실한 건,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현 정부가 위기 상황이라는 점이다. 레임덕이 시작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런 언급까지 가능하게 된 현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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