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ㆍ파마에 담긴 ‘산화와 환원’ 원리
과산화수소에서 떨어져 나간 산소가
머리카락 멜라닌 색소를 파괴해
염료가 색을 잘 내도록 도와줘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파마는
모발의 케라틴 골격을 바꿔
원하는 헤어 스타일로 연출
색다른 분위기를 내거나, 기분 전환하는데 파마나 염색만큼 효과적인 게 별로 없다. 하지만 머리 손질받으며 여유 있게 앉아 있는 그 시각, 머리카락에선 여러 화학 작용이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식물이 에너지를 만드는 광합성이나 불꽃놀이의 핵심 원리이기도 한 산화ㆍ환원 반응이 그 주인공이다.
머리카락 색상은 두 가지 멜라닌 색소가 결정
두께는 100㎛(마이크로미터ㆍ1㎛는 100만분의 1m)에 불과한 머리카락은 크게 3개층 으로 이뤄졌다. 머리카락 가장 바깥인 모표피는 비닐 모양의 단백질인 케라틴이 5~15층 겹쳐져 있다. 모발의 광택과 감촉을 결정한다. 머리카락의 중심부인 모수질을 감싸고 있으면서 모표피 안에 위치한 모피질에는 모발의 색상을 결정하는 멜라닌 색소가 들어 있다.
머리카락의 다양한 색상을 결정하는 멜라닌 색소는 크게 유멜라닌과 페오멜라닌으로 나뉜다. 검은색ㆍ갈색을 띠는 유멜라닌과 노란색ㆍ오렌지색을 갖는 페오멜라닌의 함량 차이에 따라 모발 색상이 정해진다. 검은 머리가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겐 유멜라닌이 많고, 금발이 흔한 유럽 사람들은 페오멜라닌을 많이 갖고 있다.
과산화수소의 산소가 염색에 핵심 역할
염색에는 보통 두 가지 약을 섞어 머리에 바른다. 염색하고자 하는 색상의 염료와 알칼리제를 섞은 제1제와 과산화수소가 주성분인 제2제다. 물(H₂O)에 산소가 하나 더 딸린 과산화수소(H₂O₂)는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산소 원자 한 개를 쉽게 떼어내는 경향(환원)이 있다. 이렇게 떨어져 나온 산소는 꽤 활동적이어서 다른 물질을 산화시킨다. 화학반응에서 산화는 산소를 얻거나, 전자를 잃는 걸 말한다. 산화의 반대 개념인 환원은 산소를 잃거나, 전자를 얻었다는 뜻이다.
암모니아 등 알칼리제가 머리카락을 부풀려 모표피를 들뜨게 하면, 그 사이로 염료와 과산화수소가 침투한다. 이때 과산화수소에서 떨어져 나온 산소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박재정 아모레퍼시픽 전문연구원은 “산소는 머리카락의 멜라닌 색소를 산화시켜 파괴하고, 염료와 반응해 염료가 색을 잘 낼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염색에 쓰이는 과산화수소 농도는 3~9%로 다양하다. 과산화수소 농도가 높을수록 탈색(멜라닌 색소 파괴)과 염료의 발색이 잘 된다. 하지만 그만큼 모발의 손상도 심하다.
염색약을 바른 뒤 일정 시간 기다렸다가 머리를 감는 건 탈색과 발색에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시간을 잘 맞추지 않으면 제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카락 속 멜라닌 색소가 파괴된 곳에 염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모발을 잘라내지 않는 한 염색된 색은 계속 유지된다.
탈색 시 머리카락이 노란색을 띠는 건 어두운색을 책임지는 유멜라닌이 쉽게 산화하면서 노란색 계열의 머리카락 색소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유멜라닌은 페오멜라닌과 달리, 입자 크기가 크고 화학적 구조가 불안정해 쉽게 파괴된다. 흰머리는 머리카락 속 멜라닌 색소 자체가 줄어 생긴다.
단백질 결합 깨트렸다가 다시 붙이는 게 파마
파마 역시 머리카락 속 산화ㆍ환원 반응을 이용한 머리 손질법이다. 머리카락을 이루고 있는 주성분은 케라틴이란 단백질이다. 수많은 케라틴 단백질 다발이 모여 머리카락을 구성한다. 케라틴은 또 시스틴이란 아미노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시스틴의 화학식은 HS-CH₂-CH(NH₂)-COOH로, 여기에 있는 황(S)이 이웃한 다른 단백질 다발 속 시스틴과 단단히 결합해 있다. 머리카락이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건 바로 이 시스틴 결합 때문이다.
염기성의 파마약은 이런 모발의 화학적 골격을 바꿔버린다. 파마약을 바르면 시스틴 아미노산 간의 황-황 결합에 수소를 달라붙어(환원)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다. 머리카락 모양을 고정해주던 황-황 결합이 사라졌기 때문에 머리카락 형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로드(머리카락을 감아두는 플라스틱 기구)로 말고 오랫동안 놓아두면 모든 황-황 결합이 끊어지고, 시스틴들은 황-황 결합이 깨지기 전 붙어 있던 시스틴과 다른 시스틴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이웃이 생기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중화제인 산화제를 바르면 시스틴과 결합해 있던 수소가 떨어지면서 다시 시스틴 황-황 결합이 이뤄진다. 로드의 모양대로 구부러진 상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황-황 결합은 로드를 풀어도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다. 산화ㆍ환원 반응을 이용해 단백질 결합을 깼다가 원하는 머리 모양으로 만든 뒤 재결합시키는 게 파마의 원리다. 파마할 때 열기계로 모발에 열을 쬐어 주는 건 온도가 높을수록 시스틴의 황-황 결합을 끊는 화학작용이 활발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파마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염기성 성분을 띈 나일강 유역의 점토를 머리카락에 바른 뒤 나무 막대기 등으로 머리를 말았다. 그런 뒤 직사광선에서 건조시킨 후 점토를 털어내 구불구불한 머리 스타일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파마는 1906년 처음 등장했다. 칼 네슬러란 독일 미용사가 머리카락을 염기성 물질인 수산화나트륨으로 적신 후 달군 둥근 놋쇠 막대에 말아 5시간 넘게 기다렸던 게 시초다.
박 연구원은 “알칼리성인 샴푸가 중화제(산성)를 처리한 머리카락에 닿으면 파마가 풀리게 된다”며 “황-황 결합을 새로 잇는 중화작용이 2일 정도 지속하기 때문에 파마 시술을 받고 48시간 뒤에 머리를 감는 게 좋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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