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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카슈끄지 2개월, 세계의 침묵

입력
2018.12.01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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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를 침묵시킨 사우디 오일의 힘

면죄부 준 트럼프에게 원유증산을 선물

지금 저유가에는 카슈끄지 체온 더해져

2차 대전이 끝난 뒤 세계인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였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무시가 인류 양심을 짓밟는 야만으로 귀착되었다는 반성 속에, 인권이 보장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마련했다. 1948년 12월 10일 세계 양심에 호소한 인권선언문이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이후 인권옹호는 국제법적 의무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뒤 70년 동안에도 인권은 안보, 경제란 현실과 힘의 논리에 밀려나고는 했다.

자말 카슈끄지가 숨진 건 두 달 전인 10월 2일이다. 그 사이 드러난 사실을 연결해 보면, 미국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카슈끄지는 터키의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서 자국인 15인에게 잔인하게 난도질 당했다. 그가 고국 사우디 왕정에 비판적인 글을 써오다 미운 털이 박힌 게 이유였다. 자객을 제3국에까지 보낸 범인과 관련된 팩트는 모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가리켰다. 미 중앙정보국(CIA)마저 왕세자를 지목한 마당이었다. 하지만 범인을 추적하던 국제사회는 사우디 실세인 빈 살만 앞에서 실신한 듯 멈춰버렸다.

국제사회의 경악과 공분은 2개월 만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거의 모든 나라가 차기 권력자인 빈 살만과 사우디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나마 무기금수란 상징적 조치를 한 독일이 예외에 속했다. 사우디의 원유와 오일머니가 진실을 누르고 비튼 결과였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빈 살만이 살해 지시를 내린 증거가 없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미국은 대통령과 국무장관, 국방장관이 직접 나서 증거는 없다고 면죄부를 발부, 빈 살만의 운신을 넓혀주었다.

여느 때와 달리 이번에는 침묵의 대가도 있었다. 사우디는 세계에 원유 증산이란 선물을 안겼다. 카슈끄지 사건 이후 2개월 간 사우디의 원유 생산량은 역대 최대로 추산되고 있다. 덕분에 미국의 대(對)이란 원유제재에도 국제 원유시장은 공급과잉으로 1년여 만에 가장 낮은 가격을 기록하고 있다. 사건 전후 80달러에 육박하던 미 서부텍사스 원유는 배럴 당 50달러 선으로 내려왔다. 사우디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는 별도로 15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사드 구매 계약에 서명, 고마움을 표했다. 이처럼 원유로 시커멓게 분칠된 현실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순간은 아마 빈 살만이 유족을 공개 위로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인권 잣대가 고무줄이 돼 버린 게 카슈끄지 사건 만도 아니다.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비롯한 100만이 넘는 무슬림을 강제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 되었지만, 이슬람권조차 중국에 ‘노(No)’를 말하지 않았다. 이런 정도라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어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하나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파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은 자국민이 구금됐을 것이란 지적에도 중국에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보다 한 단계 위인 치어리더가 되려는 나라들을 목도하고 있다고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는 개탄했다.

그렇지만 카슈끄지 사건처럼 세계가 한 개인의 비극을 침묵의 거래로 덮고, 그 대가를 나누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금까지 카슈끄지 사건의 최대 승자는 트럼프 대통령이고, 패자는 희생된 캬슈끄지 본인과 유족, 그리고 인권이란 가치를 붙잡고 있는 이들이다. 분명한 점은 올 겨울 북반구인들이 낮은 원유가로 더 따뜻해진다면, 그 온기에 카슈끄지의 체온이 더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저유가로 외교ㆍ경제적 부담을 줄인 트럼프 대통령이 ‘땡큐’ 트윗을 날린 상대도 사우디가 아니라 숨진 카슈끄지여야 맞다. 어쩌면 카슈끄지는 살아서 사우디 왕정을, 죽어서는 인권과 진실을 낡은 넝마로 만든 세계를 폭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ㆍ26사태 3개월 전인 1979년 6월 방한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인권 문제를 거론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한 발언이 얼마 전 백악관 외교문서에서 공개됐다. “모든 국가에게 똑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는 없다. 나라마다 특별한 상황이 있다. 안보를 위협받는 나라와 위협받지 않는 나라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인권에 관한 한 세계는 이런 상황논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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