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령 스튜디오뮤지컬 대표
2016년 스튜디오뮤지컬이 초연한 창작극 ‘아빠가 사라졌다’는 내용보다 형식으로 주목 받은 뮤지컬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를 연상시키는 해설사는 대본 지문에 해당하는 구절을 읽어 인물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를 알리는데, 변사 노릇에 그치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수십 가지 단역까지 소화하며 공연의 양념 노릇을 했다. 무대 한 편에서 대사 자막과 수화 통역사의 해설이 이어졌고, 청각 장애인 관객에게는 무대 위 소리를 전달하는 진동 팔찌가 제공됐다. 고은령(38) 스튜디오뮤지컬 대표가 이 제작기를 최근 책으로 펴냈다. ‘고은령의 장애유형별 맞춤 연극 창작법’이란 부제를 단 책은 올해 서울문화재단 예술연구 서적 발간 지원 사업에도 선정됐다.
최근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만난 고 대표는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누군가는 연구하고 정리해둘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고 대표는 장애, 비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에 ‘보들극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시각장애인에게 ‘보’이고 청각장애인에게 ‘들’리는 극장이란 뜻이다.
공연은 요양병원에 입원한 70세 남성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에겐 방송인으로 성공한 30대 딸이 있다.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헤매며 딸은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깨닫고 새삼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고 대표가 직접 대본과 가사를 쓴 이 작품에는 자전적 경험이 일부 녹아있다. 그의 전직은 아나운서. 고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했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해보니 배우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그래서 준비한 게 아나운서”라고 말했다. 2005년 KBS 공채로 입사했지만 201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 과정에 입학하며 그만두었다. 그는 “유명인이 되고 싶었을 뿐 아나운서로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꿈이 없었다. 아나운서 되고도 연극 쪽을 동경했다”고 회상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비평을 공부했고, 방송인 이력을 십분 살리고 싶어 2012년부터 팟캐스트 ‘자리주소’를 만들었다. 뮤지컬 넘버의 공연 실황을 녹음하고, 배우들을 섭외해 팟캐스트에 맞게 다시 쓴 대본으로 대사를 녹음했다. 방송 대본을 직접 쓰며 자연스럽게 “작가 별 대본 쓰는 방식”을 알게 됐다. 창작뮤지컬을 오디오극으로 각색한 이 방송을 들은 장애인방송국 관계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2013년 11월쯤 연락이 왔어요. 시각장애인들이 이 방송 잘 듣고 있는 거 아냐고. 시각장애인이 들었을 때 부족함이 없는 방송이라면, 기술 수준도 더 좋아지고 ‘시각장애인 맞춤 오디오극’이란 새로운 장르가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하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시각, 청각 장애인을 위한 연극 대본은 거의 없었다. 일단 오디오극을 공개방송처럼 각색한 낭독극을 만들었다. 곧이어 뮤지컬 ‘빨래’, ‘당신만이’를 시각장애인을 위한 무대극으로 만들었다. 고 대표는 “낭독극이 아니라 완연한 무대극, 비장애인 관객의 도움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공연이 필요했다. 시각 장애인 중 희미하게 색이나 물체를 구분할 수 있는 약시가 많고, 전맹(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장애인) 관객도 공연을 ‘본다’라고 말할 만큼 현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청각 장애인도 장애 종류, 정도가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애초에 비장애인 관객만 염두에 둔 작품을 각색해 장면 해설을 다는 건 한계가 있었다.
시각장애인용 해설 방송, 해설 영화의 매뉴얼을 참조해 쓴 첫 창작극이 ‘가족로망스’, 두 번째 창작극이 ‘아빠가 사라졌다’다. 관객 반응을 보며 수시로 뜯어 고쳤다. 자연스럽게 장애인식개선 교육 강사로도 활동했다. 신작에는 이런 과정과 장애인 관객을 위한 공연 제작 방법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두 번째 창작극 ‘아빠가 사라졌다’의 대본 전문도 실었다. 고 대표는 “장애인 관객을 위한 공연 작업을 시작한 후부터 매일 ‘내가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라는 걸 배우고 있다. 그만큼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분리돼 살아왔다는 것”이라며 “이 책은 그 동안 작업에 대한 중간보고”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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