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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한일 격차 600년, (7) 약한 분권ㆍ공익 추구

입력
2018.11.30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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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세종대에 확인된 양국 격차의 생성·확대 배경의 하나로 약한 분권ㆍ공익 추구를 검토한다. 중앙집권제의 조선에선 지방관의 임기가 짧고 권한이 작아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행정이 전개되기 힘들고 살인, 토지 분쟁 등 지역성 안건의 일부가 조정에서 다뤄진다. 분권제의 일본에선 전국 단위 안건은 대명 출신 노중들이 국무회의격인 막각(幕閣)회의에서, 지역의 행정ㆍ사법ㆍ경제 안건은 번 대명의 주관 하에 처리된다. 그런데 집권제인 조선 조정 논의의 상당수는 ‘백성을 위해...’로 시작하지만 결론이 이와 동떨어질 때가 많다. 나라와 백성 다수의 공익보다 특정 계파의 사리나 명분, 자존심이 강조된 결과다.

이렇다 보니 경장이나 변통 등 개혁 조치는 미뤄지기 일쑤다. 폐정 개혁안이 제시되면 명분, 법ㆍ규정, 중국 고사, 나아가 ‘이익이 열 배가 안되면 옛것을 안고친다’는 고어까지 동원하여 폐기 간언에 나서는 신하가 많았다. 왕조실록에 공익형 실리가 명분과 연관지어 서술된 곳은 몇 없고 내용도 부정적이다. 1780년 11월 17일 선혜청 당상 제조 이성원이 황해도 장산 8 고을의 좁쌀 금전 대납의 폐단에 대해 정조에게 간언한다. “그 고을에선 돈으로 대납하는데 이는 명분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실리는 수령에게 돌아간다.” 한편 말뿐이지만 사리, 사익 추구를 비판하는 공익 관련 서술은 이보다 훨씬 많다.

공익이 기대되나 제 때 시행되지 못한 정책으로 태종ㆍ세종 대의 차별적 신분제 폐지와 탕평정치의 조기 시행을 들 수 있다. 노비 증가는 단기적으로 양반가의 위세 과시와 재산 증식, 나라의 하급 관원 자원 확보 등에 유리했겠지만 장기적으로 군역 자원과 납세자수를 줄이고 관원의 자질 향상과 사회통합을 저해했다. 서얼차대제는 인재의 사장으로 이어졌다. 또 영ㆍ정조대의 탕평 정치가 앞당겨졌다면 부당하게 축출되고 죽임당한 인재들에게 활약 기회가 부여되어 국정의 방향과 나라의 운세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주지하듯 사화 피해자는 훗날 대부분 신원되거나 추증되고 가해자의 잘못이 인정된다.

이밖에 임진전쟁 후 제출된 강항의 간양록 예승정원계사에의 적절한 대처, 광해군의 친청 배명 외교, 순조ㆍ헌종ㆍ철종대의 천주교 용인과 개국을 통한 서구 문명 도입 등의 좌절도 공익 추구와 배치되는 실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공익 추구 사례도 있다. 사대 외교와 책봉 체제 수용을 통한 왕조의 안정 도모, 사대부들의 반대를 물리친 세종의 한글 창제와 보급, 유성룡 주도하의 이순신ㆍ권율 발탁과 명측ㆍ일본측에의 외교 대응, 통신사 파견 통한 대일 우호관계 구축, 효종~숙종 대 동전 사용 확대, 정조의 서얼 출신 등용과 실학ㆍ북학 지원 등이 그것이다.

일본에선 12세기 말 이후 무인 집권의 분권제하에 내치와 외교통상의 무게 중심이 공익 추구에 실린다. 막부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장군은 어가인(御家人)이나 대명과 주종관계를 맺고 영지와 영민을 안도하여 위임 통치토록 하며 명분과 사리보다 공익 추구 정치를 펼친다.

공익을 추구한 두 장군의 사례다. 먼저 조선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국교를 튼 무로마치 막부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다. 문무를 겸한 그는 관례를 깨고 500년만에 명에 조공하여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고 무역 특권을 얻는다. 894년 단절된 대중 조공관계를 일시적으로 복원하고 남북으로 나뉜 왕실을 58년 만에 합친다. 나아가 서민 생활을 안정시키고 다수의 국보급 문화재를 남겨 일본 역사의 품격까지 높인다.

다음은 1720년 기독교서 외 금서 완화 조치를 취한 에도 막부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다. 이 조치로 서구의 천문, 과학기술, 의료 등의 신 정보가 도입되어 해당 분야 학자와 전문가가 양성되고, 이로 인해 150년 후 근대화기에 예상되던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근면 검약을 강조하며 재임 중 20년 이상의 지속적인 개혁으로 막부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정리하면 조선에선 유학의 교조적 이념이 경주마의 눈가리개처럼 리더층의 시야를 막아, 근대 이행기에 중국보다 앞선 서양 국가와 일본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고 국력 배양에 필요한 서구학문과 기술·정보의 도입을 저해한다. 또 문관 중심의 중앙집권제라는 체제 명분에 얽매어 다양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권 강화를 통한 공익형 실리 추구 시도가 차단된다. 반면 분권제의 일본에선 지역의 번주들이 비공식 대외 무역과 서구 배우기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것은 물론, 왕성한 학구열의 관내 학자와 전문가들을 후원, 양성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막부의 개방화 정책에 제 때 대처토록 한다. 19세기에 더 벌어진 양국 국력 격차의 상당분은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지금의 정부와 여야, 노조 등 정치세력이 국내외 정치ㆍ경제 문제에 대응하면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명분보다 공익 추구를 우선하고, 중장기적으로 실효성있는 지방분권의 강화에 나서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적이 궁금하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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