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징용 대법판결 한국 정부에 항의
“삼권분립 무시 처사” 일본내 비판 불구
법치 허문 ‘사법농단’ 어떻게 볼지 난감
대법원의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난 지난달 30일 이수훈 주일 한국 대사가 일본 외무성으로 불려갔다. 외교 갈등이 불거졌을 때 항의의 뜻으로 상대국 대사를 부르는 것을 ‘초치(招致)’라고 한다. 한국 대사가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것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독도 방문 이후 6년 만이다. 한일 외교 갈등의 주제가 무엇인지 새삼 선명하다.
접견실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굳은 표정의 고노 다로 외무장관은 맞은편에 앉은 이 대사를 향해 “이번 판결은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일본 기업에 부당한 불이익을 안겨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쌓아 온 양국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에서 뒤집는 것”이라며 “법의 지배가 관철되는 국제사회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대화는 비공개 되는 바람에 이 대사의 대응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한국 정부의 입장을 확실히 설명했다”는 설명에 비춰 보면 ‘이번 판결이 한일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양국이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직후 일본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도쿄에 본사를 둔 유수의 전국지 사회부 기자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이날 외무장관의 이 대사 초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신문사가 해명까지 하고 나선 일이다. 기자가 썼던 글은 이렇다. “한국 정부에 ‘너네 대법원을 어떻게 좀 해라’라고 요구하는 건가.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일본 국내에서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이상한 줄 모르는 거겠지.”
이 글에 대한 비난은 대부분 ‘한국 대법원 판결이 국가 간의 약속을 무시한 잘못’이라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신문사의 해명 역시 “폐사의 견해는 31일 자 사설대로”라며 대법원 판결 내용을 비판하는 쪽이었다. 반응에 놀란 것인지, 사측의 요구인지 알 수 없으나 글을 쓴 기자는 “부적절한 내용이어서 전문을 삭제한다”고 한 뒤 아예 자신의 계정을 없애 버렸다.
알 수 없는 것은, 쏟아진 비난이나 사측 해명의 초점과 달리 기자의 트위터 글에는 이번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잘잘못을 따지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왜 한국 대법원이 내린 판결에 대해 정부 대표를 불러 따지느냐고 물었을 따름이다. 일본 정부나 여론의 빗나간 반응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국가 간의 약속을 어긴 문제 있는 판결로 여기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압도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자의 지적대로 사법과 행정을 혼돈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를 묵과하기 어렵다. 일본은 중국을 향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 시장경제, 인권 등과 함께 ‘법치’가 없는 나라라고 비난한다. 외무성 간부들은 한국이 일본과 가장 통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이번처럼 가끔은 한국을 향해서도 그런 시선을 보낸다. 그런 일본이니 “삼권분립을 무시”했다는 의견은 지극히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사실이라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가 관철되지 않은 지난 시절 사법 농단 때문이다. 일본과 외교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이번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을 연기했던 정황(이에 대해 법치를 강조하는 일본 정부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을 비롯해 여러 재판 개입 의혹, 판사 블랙리스트 정황 등은 이 나라에 법치가 있는지 의심케 한다.
대법원 판결 다음 날 일본 자민당 외교 분과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나카소네 히로후미 전 외무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은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것 아닌가.” 적어도 사법 농단으로 점철된 지난 정권을 돌아볼 때 이를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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