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결정전 날 아프리카서 ‘낭보’
하늘이 내려준다는 천하장사가 온갖 역경을 딛고 새로 나타난 날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 참석한 천하장사 출신 이태현(42) 용인대 교수는 26일 오후(한국시간) 메신저를 통해 “씨름이 남북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다급히 1신을 전해왔다.
한반도 고유의 세시풍속놀이 씨름이 사상 첫 남북 공동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 받자 침체에 빠져 있던 모래판은 모처럼 경사 분위기였다. 때마침 이날 경북 안동에선 한 해 최고 권위의 대회 2018 천하장사 결정전이 열려 겹경사의 축하 자리가 됐다..
이준희(60) 대한씨름협회 경기운영본부장은 “남북 공동 등재로 우리 민족의 씨름이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고, 남북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졌다”면서 “당장 씨름이 흥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씨름을 존속시킬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국내 유일의 민속씨름단(프로)을 지휘하는 김기태(38) 영암군청 감독 역시 “전 세계에 씨름을 더 많이 알릴 수 있게 됐다”며 “우리나라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민족 씨름을 상징하는 씨름전용경기장이라든지, 씨름박물관 등을 건립한다면 홍보 효과도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씨름협회는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유네스코 등재를 기원하며 씨름과 비슷한 종목을 보유한 6개국 60여명의 선수를 초청했다. 특히 몽골과 스페인 선수들은 만만치 않은 기량을 뽐내 ‘씨름의 세계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스페인의 마르코스는 쟁쟁한 우리 선수들을 제치고 16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모래판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씨름 인생에서 벼랑 끝까지 몰렸던 박정석(31ㆍ구미시청)이 데뷔 첫 우승을 천하장사로 장식했다. 박정석은 결승전(5전3승제)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인 2014년 천하장사 정경진(31ㆍ울산동구청)을 3-1로 꺾고 처음으로 꽃가마를 탔다.
지난해 추석 대회 결승에서 같은 상대였던 정경진을 맞아 2-0으로 앞서고 있다가 2-3으로 역전패한 악몽이 있었던 그는 이날도 먼저 두 판을 따낸 뒤 세 번째 판을 내줘 위기 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네 번째 판에서 경고승을 거두며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천하장사 등극을 현실로 이뤄냈다.
상금 1억원을 가져가는 박정석은 경기 후 “경남대 졸업 후 처음 고향 팀인 태안군청에서 6년 있었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해 더 이상 설 자리도 없었고, 나를 받아주는 팀도 없었다”며 “오갈 데 없었던 시기(2016년)에 김종화 구미시청 감독님이 ‘넌 열정이 있으니까 한번 기회를 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줬다.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쁘고, 고생했던 것들이 떠올라 눈물이 나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씨름의 유네스코 등재 소식을 듣고 미소를 지은 박정석은 “씨름이 인생의 목표라서 하는 것도 있지만 문화유산을 지켜간다는 자부심도 있다”면서 “너무 잘 됐고, 감사한 일이다. 모든 선수들이 씨름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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