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세 달이 지나고선 월급이 제때 나온 적이 없어요. 그래도 정부에 신고하면 바로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몇 달 째 해결이 안 되니 답답하죠.”
지난해 말 정보기술(IT) 스타트업 기업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던 김예선(26)씨가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임금체불 때문이었다. 회사는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매달 초에 줄 돈을 중순에 주거나 여러 번 쪼개줬다. 두 달 이상 월급이 밀리자 김씨는 올해 8월 퇴사 후 관할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었지만, 아직까지 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는 “한 달을 기다려 겨우 근로감독관을 만났는데, 담당 감독관이 바뀌었다면서 조만간 다시 출석하라고 하더라”면서 “아무리 바쁘다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체불 공화국’. 국내 체불임금 규모가 매년 1조원을 웃돌면서 쓰게 된 오명(汚名)이다. 정부는 올해 초 ‘체불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를 감당할 관련 인력이나 제도가 미흡한 상황에서 임금체불액은 지금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26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총 24만여명의 근로자가 1조2,000억원에 달하는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추세라면 올해 전체 체불액은 역대 최대였던 2016년의 1조4,200억원을 넘어 설 가능성이 높다. 국내 체불임금 규모는 2009년 이후 단 한번도 1조원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있으나 정부는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룰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체불임금 신고사건 처리가 근로감독관 전체 업무량의 82.8%를 차지하는 데다가, 근로감독관 1인당 평균 50여건의 관련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근로감독관은 노동관계법 전반을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이어서 신고가 들어온 임금체불 문제 해결에도 허덕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사전적 예방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처지”라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근로자가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내고, 사실관계 조사를 거쳐 체불임금 지급지시를 받아내는데까지 수개월이 걸린다. 고용노동청으로부터 지급 지시를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일도 아니다. 사업주가 지시대로 밀린 임금을 지급하거나 사업주와 근로자가 합의를 본 ‘체불임금 해결률’은 매년 50% 안팎에 불과하다. 사업주가 체불임금을 주지 않고 버틸 경우 근로자는 직접 민사소송을 하는 방법 밖에 없다. 알바연대노조 관계자는 “임금체불액이 100만원 안팎의 소액일 경우에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민사소송까지 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 “근로감독관의 시정조치를 강화해 법정까지 가지 않고도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역시 악화일로를 걷는 체불임금 해결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고용부 용역으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작성한 ‘근로감독행정 혁신방안 연구 최종 보고서’는 “임금체불 청산기구(또는 임금체불신고센터)에서 원스톱 체불청산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인 개편 방안”이라고 권고했다. 별도의 임금체불 청산기구를 두고 근로자가 여기에 한번 방문하는 것으로 체불청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부는 이를 바탕으로 조만간 근로감독 혁신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근로자가 임금체불 등 피해를 받기 전에 사전적인 근로감독을 실현하는 등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근로감독 행정 환경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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