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19세기 말 베닌 왕국 강제합병
청동 유물 수천여 점 빼앗아 소장
2021년 개장 나이지리아 박물관에
반환 대신 대여해 전시하기로 결정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도 대여 논의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은 전 세계 유물 약 800만점을 소장한 인류 역사의 보고다.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유물을 약탈한 영국 제국주의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국이 1897년 지금의 나이지리아 남부에 위치한 베닌 왕국을 강제로 합병할 때 빼앗은 수천여 점에 이르는 청동 유물을 ‘베닌 브론즈’라 부르는데, 그 상당수가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품이다.
28일 영국 타임스오브런던 보도에 따르면 대영박물관이 나이지리아 베닌시티에서 2021년 개장하는 왕립박물관에 이 베닌 브론즈를 대여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10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베닌대화그룹(BDG)’ 회의 합의안에 따른 결정이다. 2007년 조직된 베닌대화그룹은 나이지리아 문화유산위원회ㆍ베닌 왕실과 유럽 각국 박물관의 협의체로, 베닌 브론즈의 환수 방안을 논의해 왔다. 앞서 유물의 완전 환수만을 주장하던 나이지리아가 대여 전시에 동의할 뜻을 보이면서 논의가 진전됐다.
이 합의는 일단 베닌 브론즈를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지만, “애초에 약탈한 물건을 출처 국가에 대여하겠다는 발상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대 위르겐 치머러 아프리카사 교수는 “대여가 환수나 소유권 확인 논의를 대체하는 수단이 돼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일단 영국과 나이지리아 양측은 이번 대여가 유물의 소유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의미는 아니라고 확인했다. 잠정 합의인 셈이다. 베닌 브론즈 외에도 대영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엘긴 대리석, 이집트 로제타석 등이 장기대여 형식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대영박물관뿐 아니라 유럽에선 옛 제국주의 시절 탈취한 유물을 본국으로 되돌리려는 논의가 활발하다. 물론 구 식민지 쪽 환수 요구 자체는 역사가 오래됐지만 유럽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변한 건 최근의 일이다. 프랑스의 경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위촉한 독립 전문가 패널이 지난 23일 “아프리카 정부가 요구하면 프랑스 유산법을 개정해 유물 영구 환수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라고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11월 부르키나파소를 방문해 “아프리카 유산을 유럽에 내버려둘 수 없다”라고 연설하며 의지를 보인 바 있다.
다만 이는 마크롱 대통령이 아프리카 남부 옛 식민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내놓은 전략적 발언으로, 북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다른 지역 문화재까지 확장되지는 않고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심체요절 등 한국 문화재의 환수 논의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대부분 유럽 박물관은 영구 환수는 논외로 치고 대여만 가능하다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다. 칠레령 이스터섬의 타리타 알라르콘 라푸 주지사가 지난 20일 대영박물관 앞에서 이 박물관에 전시된 모아이 석상 ‘호아 하카나나이아’ 환수를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자치권을 얻은 섬 원주민 라파누이인은 이 석상에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라푸 지사가 “우리의 영혼을 돌려달라”라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대영박물관은 환수가 아닌 대여를 전제로 논의에 나섰다고 밝혔다.
1970년 체결된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부당 유출된 문화재는 반드시 본국으로 환수하게 돼 있다. 그러나 과거 식민지 시기에 탈취된 유물에 대해서는 합의된 바가 없다. 이마저도 유럽 국가는 식민지 시절 모은 유물을 옛 식민지 국가가 돌려달라고 요구할 것을 우려해 비준을 주저했다. 프랑스는 1997년, 영국은 2002년, 벨기에는 2009년에야 비준을 마쳤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