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집 ‘리버스 오브 타이거’ 내
미국에서 주목받았던 ‘래퍼 꿈나무’는 1990년대 후반 한국으로 건너와 음반 제작자들을 만난 뒤 절망에 빠졌다. 오디션 자리에서 그가 처음 들은 말은 “자, 일어서서 돌아 봐”였다. 잘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랩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하자 “춤춰 봐” “점프해 봐”란 황당한 요구만 돌아왔다고 한다. 제작자들은 그의 랩을 깔아뭉갰다. 국내 한 댄스 그룹의 CD를 틀고선 “이게 정통 힙합”이라며 오히려 청년을 다그쳤다.
“음악 같지 않은 음악들 이젠 모두 다 집어치워 버려야 해”. 래퍼 타이거JK(본명 서정권ㆍ44)는 1999년 데뷔곡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로 국내 힙합신에 강렬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22일 서울 홍익대 인근 호텔에서 만난 그는 “어린 나이에 정말 충격을 받아 그런 곡을 썼다”며 웃었다. 힙합 듀오 드렁큰타이거 멤버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타이거JK는 ‘날 널 원해’를 비롯해 ‘위대한 탄생’, ‘굿 라이프’, ‘몬스터’ 등의 히트곡을 내며 힙합 음악의 불모지였던 국내에 정통 힙합을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했다.
‘한국의 힙합 대부’는 올해 활동 20년째를 맞았다. 활동할 때마다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지난 5년은 그에게 ‘악몽’ 같았다. 전 소속사로부터 수억 원대의 사기를 당한 데다 삶의 기둥과도 같았던 아버지를 잃은 시기라서다. 타이거JK는 “모두 내 잘못인 것 같았고 현실이 너무 싫어 폐인처럼 살았다”며 “9집 ‘살자’(2013)를 마지막으로 음악을 그만두려고도 했다”고 고백했다. 경기 의정부에 사는 타이거JK는 “집 주위에 학교가 많아 어머니와 떡볶이집을 운영할 생각”까지 했다.
어둠의 터널을 간신히 지난 타이거JK는 최근 10집 ‘X: 리버스 오브 타이거JK’를 냈다. 그는 30곡을 두 개의 CD에 빼곡히 담아 드렁큰타이거 그리고 타이거JK로서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는 2005년 DJ 샤인이 팀을 떠나면서 홀로 드렁큰타이거로 활동했다. 타이거JK가 “어린 정권의 포효”라고 외친 곡 ‘이름만 대면’이 드렁큰타이거의 음악이라면, “인생은 리어카 난 추억을 싣고 가마”라고 읊조린 노래 ‘뷰티풀’은 40대 중반에 접어든 타이거JK의 얘기다. 타이거JK는 “드렁큰타이거는 ‘타임캡슐’에 넣고 그만 문을 닫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 앨범은 그가 드렁큰타이거로 내는 마지막 앨범이다. 젊어서 토해냈던 날 선 언어 대신 아빠, 남편이 된 변화된 삶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어서다.
타이거JK의 사무실 화이트보드엔 ‘(아내인 래퍼) 윤미래가 지켜보고 있다, 단디 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타이거JK는 신작에서 방탄소년단 리더인 RM(‘타임리스’)을 비롯해 래퍼 도끼(‘이름만대면’) 등과 작업하며 창작의 길을 넓혔다. 타이거JK는 도끼의 빈털터리 시절, 그에게 외할머니 장례비를 내준 은인이기도 하다. 타이거JK는 “항상 증명해야 했고 모든 앨범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더 미쳐 작업했다”며 “음악팬들에게는 필요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던 래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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